최근 세 번째 방문한 나파밸리에서의 경험이 아주 좋았습니다. 친구와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하면서 두 곳을 미리 예약했습니다. 예약을 하면서 고려한 것은 두 가지. 와인테이스팅 말고 다른 즐길거리가 있을 것, 최근 내가 맛있게 먹은 와인들 중 한 곳의 생산지 일 것. 그렇게 해서 '헤스(hess) 와이너리'와 '더 프리즈너(The prisoner) 와이너리'를 다녀왔습니다.
헤스는 알고보니 아주 오래된 곳이었습니다. 1903년에 '루츠 와이너리'란 이름으로 세워진 곳으로 금주령 때 수도회가 와인과 브랜디 생산에 쓰던 곳입니다. 1978년 도날드 헤스라는 스위스 사업가가 인수해 지금의 헤스가 시작됐습니다. 또 이 주인장은 현대 미술품 수집가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자신의 소장품을 와이너리에 전시하면서 와인+아트 갤러리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와인도 마시고, 미술품도 즐길 수 있습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오래된 역사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관이 중세시대 성곽같았고, 풀이나 꾸며진 정원도 꽤나 오래동안 깎이고 가꿔져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랜 세월만큼 그간의 이야기도 많아 투어 가이드는 금주령때 썰, 주인이 바뀌게 된 이야기를 해주고, 2014년 지진이 나서 이 와이너리에 보라색 포돗물이 흐르는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헤스를 넘어 나파밸리의 과거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손님도 우리 일행과 노부부뿐. 와인만 먹으러 갔다가 갤러리 작품까지 보고 나오니, 여유를 부리면서도 시간을 많이 절약한 기분까지도 들었습니다.
그 뒤에 이동한 '더 프리즈너 와이너리‘는 정반대 분위기였습니다. 2000년에 설립된 ‘아기 와이너리'. 인테리어부터 성수동 느낌이 물씬 났고, 손님들도 젊었습니다. 와인 이름에 충실하게 쇠맛 소품들과 강인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티셔츠나 볼캡같은 굿즈도 팔고 있었어요.
각각의 와이너리 자체보다 좋았던 것은 두 와이너리 간 조화였습니다. 더 프리즈너에 가지 않았다면, 헤스에서 느낀 여유와 고즈넉함이 특별하지 않았을 거에요. 헤스에 가지 않았다면 더 프리즈너의 젊음, 힙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근본이 부족하다, 너무 유서깊지 못하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덜 더울 때 헤스의 예쁜 야외좌석에 앉았다가 더워진 뒤 실내가 더 예쁜 프리즈너에서 마무리한 것도 좋았습니다. 성수동 카페 감성의 굿즈들과 헤스의 오래된 미술소장품들의 대비도, 나파밸리의 과거와 미래를 본 것 같은 조화도 좋았어요.
두 와이너리를 비교해보며 각 와이너리의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두 경험이 합쳐져 확장되고, 다른 기억과 연결돼 풍부해집니다. 단 두 곳의 와이너리만으로 밤 새, 정말 밤 새 얘기 할 수 있습니다. 다음번에 다른 곳과 헤스를 또다른 곳과 더 프리즈너를 연달아 가면 또 다르게 즐길 수 있을겁니다.
사실 지난 8월 나파밸리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당시엔 1박 2일 일정으로 스탈링(Sterling) 케이머스(Caymus), 크룹브라더스(Krupp brothers) 와이너리 세 곳을 하루에 갔었습니다. 첫 번째 갔던 스탈링 와이너리는 와인 맛은 쏘쏘였지만, 곤돌라를 타고 고도가 높은 곳에 있는 와이너리에 가는 경험이 좋았어요. 와인+풍경+엔터테인먼트 느낌. 케이머스는 그런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는 없지만, 와인 사면 테이스팅피가 무료인 '가성비 끝판왕'인 곳이라, 맛있게 와인먹고, 그 중 제일 맛났던 와인을 골라 사오는 경험이 재밌었습니다. 크룹브라더스는 정말 거의 아무런 후기가 없어서 걱정하면서 갔던 곳인데요. 함께 갔던 친구와 한국의 한 식당에서 먹어봤던 와인이에요. 남한텐 별로일 수있어도, 둘 만의 추억이 남긴 곳이라 그 나름대로 특별했어요. 또 앞선 두 와이너리에서 보여주지 않던 포도밭에 직접 데려가준 것도 좋았습니다. 한 8시간에 걸쳐 계속 와인을 마시니 좀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음날 와인 테이스팅 대신 올리브오일 테이스팅을 했더니, 그 모든 경험의 기쁨이 배가됐습니다.
이렇게 경험이 페어링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좋지않은 경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미국 3대 국립공원 중 하나인 요세미티에도 다녀온 일도 언급하고싶습니다. 여러 볼 곳 중에 이튿날 조식을 먹으러 ‘아와니’라는 호텔에 갔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결혼을 했던 곳이기도 한데, 너무 비싸서 잠은 못잤고 조식만 먹으러 갔어요. 너무 너무 예쁜 풍경과 다이닝홀에 한껏 기대를 했는데, 세상에 프렌치토스트가 너무 너무 맛이없더라구요. 프렌치토스트가 맛없는 것도 놀랍지만 모든 것이 대단한 공간에서 맛없는 음식은 심지어 엣지처럼 느껴졌습니다. 토스트가 맛없는 ‘덕분에’ 그곳의 대단함이 더 매력있었고, 토스트가 맛없는 ‘덕분에’ 그저 좋았던 기억엔 색깔이 생겼습니다. 사람의 향기는 인간미가 만드는 것처럼.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데다 호기심도 많은 저는 또래보다 비교적 많은 경험들을 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따분한 미래를 지레 걱정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나이들어 더이상 새로움이 없으면 어떡하지, 지루한 어른이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 그래서 40대엔 요리마스터를 50대엔 골프를 60대엔 명리학 공부를 하겠다며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미래에 나에게 양보(?) 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오만함이었다고 생각하며 안도합니다. 갖가지로 다양한 경험을 페어링하면 낡은 경험도 새로워지고, 나쁜 경험도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지겨우면 함께하는 친구를 바꾸고 마음가짐을 바꾸고 공간을 바꾸지뭐. 5가지 경험은 5가 아니라 5!이듯이, 와인처럼 경험도 이것저것과 다르게 페어링하며 즐겁게 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