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 중에서
→ 따라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오
는 퉁 불거진 사내를 만나거나 하얀 모시를 처맨 다 시어
빠진 여편네를 만난다
삶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보양의 탕 속에서 녹작지근해지거나 혹
천기누설의 값을 치르고 몇 가지 길흉을 얻어내는 게
너냐?
어쩌자고 고여 있는 것들은 뚱뚱해지거나 비썩 마르게
되는가
마음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그 골목길 쓰레기통 옆에서 몸은 마른 쥐껍데기
사라진 몸은 이빨 자국만 남긴다 버려진 욕망 같은 저
수박 껍데기
→ 따라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두 다리를 오므리고 소
리죽여 오줌 누는 계집애를 만나다
오줌 줄기가 내어놓은 → 의 아련함, 무심함으로
슈퍼 라디오는 노래한다 라디오는 흐른다
그런 것이냐, 견딜 수 없는 저열과 함께
→ 쭉 따라, 가는 게 너냐 그런 것이냐
허수경( 1964 ~ 2018) 시집 『혼자 가는 먼 집』(1992) 중에서
골목길에서 보이는 → 표시를 따라가다 만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오는 퉁 불거진 사내나 하얀 모시를 처맨 다 시어 빠진 여편네는 골목길 막다른 곳에서 만나는 존재들이다.
보양이나 하며 적당히 흐트러져 살거나 원죄를 지은 대가로 이런저런 길하고 흉한 일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 고작 그게 삶이냐고 시인은 묻는다. 골목길 같이 좁고 방향을 알 수 없는 인생길에서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퉁 불거져 나와 주변을 불편하게 하거나 그 길 안에서 비썩 말라 시든 존재들, 그들은 생동감 없이 고여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 를 따라가는 나도, 거기서 만나는 존재들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그저 그 표시가 가리키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넓은 세상이 아닌 골목길에 갇혀서 몸은 사라지고 껍데기로만 남는다.
고작 그렇고 그랬던 지난 삶에서 남은 것은 껍데기에 남은 이빨 자국 즉, 상처뿐이다. 욕망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다. 이룰 수가 없으니까. 수박 껍데기같이 버려질 뿐이다.
또 다른 막다른 곳에서는 오줌을 누는 계집애를 만난다. 그녀는 그저 무력하고 소심하게 본능을 흘려보낼 뿐이다. 오줌 줄기 소리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 그저 아련하고 무심할 뿐이다. 그냥 그렇게 아무 의지도 없고 선택도 할 수 없는 골목길 같은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저열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게 삶이냐고 시인은 다시 묻는다.
이 시는 허수경 시인이 20대에 낸 시집에 실려 있다. 젊은이가 삶을 이토록 왜소하고 비루하게 형상화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청춘은 그들이 학교에 있던 공장에 있던 정의를 상실한 울분과 투쟁의 땔감으로 소모해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승리와 회복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청춘을 불사르면 나의 인생이, 나의 조국이 이전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몸과 맘을 다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수경은 동시대의 청춘들과는 다르게 인생을 응시했다. 조숙하게도, 삶이라는 것은 누가 그려놓은지도 모르는 화살표를 그저 쭉 따라가며 저열하게 살다가 상처투성이인 껍데기로 끝나거나 부끄러운 본능의 찌꺼기를 배설하고 마는 길일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 시뿐 아니라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에서도 시인이 그리는 삶은 희망, 용기, 꿈같은 것이 아니라 아픔, 외로움, 슬픔으로 점철될 뿐이었다. 이념이나 야망을 꿈꾸기도 훨씬 전에 절절한 생의 아픔, 허무, 가난, 부조리를 먼저 목도해 버린 탓에, 정의를 부르짖는 청춘의 대열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찾고자 하지 않았던 시인의 외로움이 전해져 나도 아팠다.
한 평론가는 허수경은 젊어서 늙어버린 시인이라고 했다. 삶이라는 것이 결국 어디로 나아가는지 알아버린 시인은 시집을 내고 독일로 유학을 가 고고학을 공부했다. 그럴듯한 직업인 교수가 되고 싶어서 그 길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설 자리가 없는 미래를 향한 의욕 팽배한 이 땅을 떠나 고요히 인간 근원을 돌아보는 고독한 공부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 길은 분명히 견딜 수 없는 저열과 함께 쭉 → 를 따라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