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아무 이유도 없이 이렇게, 이토록, 이다지도 미울 수가 있을까.
미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미울 수밖에 없는 이유, 듣고 나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이유가 하나쯤은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유 그거였다. 구세주라는 예언 때문에 평생을 미움받고 살아간 이였다.
팩트는, 아무리 뒤져봐도 그분을 미워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는 그런 분이셨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숨결 같으신 분. 자신을 그토록 미워한 사람들의 운명을 끝까지 사랑하신 분의 순애보, 나를 위한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 우리 예수님의 이야기다.
예수님이 나 같지 않으시니 천만다행이다. 나에게는 나를 배척하는 사람에게 대한 눈곱만큼의 여유도 없다. 굳이 나를 밉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낌새라도 눈치챘을 시엔 그 순간 바로 아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당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
그래서 트집 잡고 오해를 만들고 소문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주셨다는 그 사랑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나를 향한 것이었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릴 수가 있겠느냐? 내가 어찌 네가 멸망에 빠진 것을 볼 수 있겠느냐? 네가 불의의 잔을 채우도록 놔두어야 할까?”(DA, 577)
말씀에 나를 비추면 세상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나의 교만을 내가 보고, 나의 위선을 내가 본다.
유대인들과 바를 바 없는, 그리고 제사장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내 모습이 보인다.
구세주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을 향한 비웃음과 예수님을 배척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온다.
이토록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향해, 지는 해의 마지막 광선이 감람산을 비추고 성전의 망대와 누각 위에 머물러 있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은혜를 간청하셨단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은 아직도 당신의 자비를 조롱하고 당신의 경고를 멸시하며 그분의 피로 저희 손을 더럽히려고 하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청하였다. 만일 예루살렘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DA, 578)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간청이라니...
곧 십자가에 달리실 운명을 감지하신 그분께서 그 고통의 운명을 앞에 두고 흘리신 눈물은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슬픈 이유는 나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고, 나의 눈물은 나와 가족을 위한 것이며, 나의 희생은 궁극적으로 나의 인생을 위한 삶...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향한 간청이라는 깨달음에 닿는 순간,
내게서도 비난이 사랑으로 바뀐다.
회개하기만 한다면 아직 너무 늦지 않은 그 순간까지도 유대인의 운명을 위해 간청하셨던 그분의 간구가,
시와 공을 뛰어넘어 오늘날 코로나의 위협과 죄악의 공포로부터 두려운 나를 위한 사랑의 간구로 전해 온다. 이 깨달음은 온전히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온몸에 이기심의 가시가 돋친 채 살아가는 삶을 위해 잠시 휴식처럼 주시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