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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파는 광고인의 책을 펼치고

어릴 적 꿈꿨던 광고회사 일상 간접체험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김혜경 작가가 직접 나왔다. 평소 에세이를 즐겨 읽는 (정확히 말하면 이제 즐겨서 읽게 된) 편이라, 광고인이 매일 뽑아내는 글은 어떤 재질일까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어릴 적이라 하면 (100세까지 사는 시대이니까 나는 아직도 어린 편) 대학시절 광고학회 일원이었던 만큼, TBWA 같은 류의 광고회사에 들어가 국제 광고제에서 상을 받아보는 게 한때 꿈이었기에 호기심이 돋기도 했으니까. 


진로 선택이 비교적 뚜렷했던 나는, 광고학회 MT도 즐겼다. 정말 놀러 간 친구들은 광고회사에 다니는 대선배님들이 그 자리에 찾아오는 게 분위기에 맞지 않아 싫어했을 테지만 광고쟁이를 꿈으로 뒀던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비록 광고 생활이 진짜 쉽지 않다면서 줄담배를 연신 피우고 비워도 금세 채워지는 술잔을 쥐고 있는 취기 가득한 선배들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진짜 광고를 하고 싶다고. 


물론 지금은 고민 끝에 과감히 틀고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았지만, 그때는 그 대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전해지는 광고회사의 현실이 마치 웹툰 전개 마냥 자극적인 요소가 가득했던 걸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이미지 좋은 대기업 소속 광고주의 더러운 성격(심지어 지금도 갑질의 대명사로 뉴스에 자주 거론되는 인물), 피할 수 없는 고객사와의 술 접대 자리, 밤을 새워 만드는 광고 비딩 제안서(잘 되면 광고 찍고 안 되면 밤샘이 물거품이 된다지), 광고 제작까지 하나를 쳐내기에도 지난한 과정들이 비교적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었다. 관심이 많았으니까. 


75p.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나는 어떤 주문도 거절할 수 없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 그럼 일단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얼음을 하나씩 넣어보면 될까요? 당신의 손이 따뜻하면서도 어느 정도 차갑다고 느낄 수 있을 때 까지요! 놀랍게도 일이 정말 이딴 식으로 진행된다. 얼음 하나를 뺄 때마다 이 온도와 농도가 입에 맞는지 드셔 보시라고 광고주에게 들이미는 일이 반복이 곧 광고 제작의 지난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번 대체 ‘어쩌라는 거야’ 싶지만, 생각해볼수록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서 이젠 포기하기로 했다. 애초에 사람의 마음이란 게 복합적인 거니까.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면 굳이 남에게 맡겼을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다 받아보고 싶으니까 우리한테 일을 줬겠지…그런데 나 언제부터 이렇게 납득해 버렸지? 


나는 이 페이지와 마주쳤을 때 와... 감탄했다. 광고회사라는 업종만 다르지, 클라이언트와 협업하는 과정이 너무 솔직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자든 디자이너든, 기획자든 클라이언트가 만족할 때까지 논리와 상관없이, 클라이언트가 세우는 논리에만 맞춰가면 되는 것이었다. 따. 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했더라면 조금 더 일을 가볍게 쳐낼 수 있을 것 같다. 김혜경 작가는 정말 표현의 귀재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 과정을 납득해 버리는 순간 한 고비가 지나고 뿌듯한 광고 한 편이 완성되어 있겠지. 이 맛에 마약 같이 퍼지는 뿌듯함이 일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그 맘도 너무 공감이 된다. 어떻게든 끝내버린 일은 이 놈의 일 때려치워야지 하는 충동적인 생각들도 쏙 들어가게 만드는 것도.   


84p. 난 이렇게 생각한다. ‘난 고작 이런 거에 지지 않아…그렇지만 이길 필요도 없지!’ 이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놓인다. 애초에 회사 일이란 게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기에 굳이 덤벼들 이유가 없다. 악으로 깡으로 주장을 관철하려 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최고가 정말 최고라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그런가 하면, 끝이 보이지 않아 지칠 때는 또 이렇게 생각한다. ‘대충 힘내면 어떻게든 해결된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두통을 참으면서 일을 했던 때도 있었다.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고 고민이 하나둘이 아니라 대여섯 개가 동시에 펼쳐지는 때에 이 글을 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맞다. 일은 일일뿐인데, 회사를 애초에 이길 필요가 없는데 오기로 분투하면서 살아냈던 내가 떠올랐다. 심지어 나는 오기와 분투를 이겨낼 때마다 글을 썼고, 에세이 <망하려고 만든 게 아닌데>라는 책을 한 권 만들어냈을 정도니까. 대충 힘냈어야 했다. 일 자체를 너무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조금 더 가볍게 생각했더라면 조금 달랐을까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한숨을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125p. 맥주 한 잔을 나오자마자 단숨에 들이켠 그가 단전에서부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소리는 굉장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광고주 보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처음부터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이 그저 맥주를 원샷했을 뿐. 그렇지만 선배는 몹시도 개운해 보였다. 그때 느꼈다. 술이 일을 해결해주진 못해도, 적어도 일하는 사람의 마음 정도는 다독여준다. 그거면 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이제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답한다. 맥주나 마시지, 뭐.


김혜경 작가와 그의 친구들은 굉장히 술을 좋아한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어나더라운드>의 도입부가 말하는 것처럼, 혈중 알코올 농도를 조금 유지하면 우리의 인생은 축제가 된다. 현실은 달라질 게 없지만, 우리의 태도가 잠시 동안 달라지게 하는 것. 그것이 술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니까. 이 작가는 술을 정말 좋아하고 옆에 두는 것 같다.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어줄 수 있고 글을 더 신나게 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된 거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광고회사여서 다른 점은 사용하는 용어 정도만 다를 뿐 대개 비슷한 마음가짐, 비슷한 상황이어서 이질감이 별로 들지 않았다. 작가님 같은 직장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만약 내가 광고회사에 다녔다면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도전할 과제가 자주 바뀐다는 점에서 광고회사의 사이클에 어느 정도 안착하면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동안 몸에 축적된 술자리 문화와 야근 습관으로 인해 몸이 정신보다 더 빨리 축났을지도 모르겠다. TBWA의 김민철 작가도 그렇고 제일기획 출신 김혜경 작가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이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회사를 나와서 무엇을 시작해도 성공할 수 있는 열심 DNA와 맷집 DNA는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지만, 그 속에서 너무 나 자신을 매몰시키지 않고 스트레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술, 동료들, 적당한 보상과 성취감 같은 것들의 균형이 직장 생활의 근력을 키워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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