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단편 소설의 단상
여자가 되물었다. 뭐가 여기까지예요? 재촉하는 여자에게 그가 대답했다. 우리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거요.
덩치 큰 차가 한 대 지나가면서 지표가 흔들렸고 요란한 바람이 불고 시커먼 매연이 쏟아진 후로 도로는 내내 잠잠했다.
세 대의 담배를 잇달아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뭔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작고 흰 점이었다. 점은 계속 움직였고 점차 커졌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불분명한 형체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흰색 운동복이었다. 가슴과 등에 숫자가 적힌 번호판을 단 마라토너였다. 그가 곁을 지나갈 때 후후 하하 하고 코와 입을 통해 일정한 간격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안정적인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김은 어둠에 모습을 감춘 국도 속으로 마라토너가 서서히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흔들리는 흰 점이 되어 차츰 작아져가다가 끝내 숨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 완전한 소멸은 오히려 어둠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도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일깨웠다. 김은 홀린 듯 흰 점을 삼킨 어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김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이 모는 것과 같은 종류의 트럭이었다. 바람 소리나 바퀴 소리, 짐칸에 넣어둔 물건이 덜컹거리는 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잘못 들었지 싶었으나 트럭이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다시 한번 선명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모습을 감춘 운전자가 부는 모양이었다.
어른은 혼수상태에 빠진 이가 으레 그렇듯 인공 장치의 힘을 빌려 숨을 끌어올린 후 천천히 내뱉는 식으로 숨을 이어가고 있다 했다.
김은 휘파람 소리만 내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을 공연한 호기심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곡선 도로를 무리하게 돌던 트럭이 김의 시선에 놀란 듯 갑자기 사선으로 기울어지더니 노면을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트럭은 순식간에 가드레일에 부딪혀 옆으로 기울어졌고, 놀란 김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전에 불길이 치솟더니 이내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운전자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이 이미 그를 삼킨 것인지 그 전에 용케 빠져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트럭을 삼킨 불꽃이 순식간에 밤의 국도를 밝혔다.
그러나 진심과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는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어떤 말도 돌이킬 수 없어 화가 날 것이고 그 말이 불러온 상황과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 것이며 그럼에도 당시 마음에 인 감정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 것이었다.
김은 땅에 박힌 듯 멈춰 서서 조등(弔燈)처럼 환히 빛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