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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Oct 31. 2020

희대의 팜므파탈인가,  가족의 희생양인가..

; 르네상스의 또 다른 여인, Lucrezia Borgia


물결치는 듯 빛나는 금발에 짙은 파란 눈, 매력적인 외모에 당대 최고 권세가의 일원으로 근친·독살·음모 등 자극적인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는 르네상스의 또 다른 상징적인 여인 Lucrezia Borgia..


희대의 팜므파탈로 불리며 Borgia가의 딸이 아닌 진정 Lucrezia로 살면서 그녀가 자신의 공국을 위해 일궈낸 업적들은 무시당한 채 야망과 권력욕이 넘치는 아버지와 형제의 희생양이자, 자극적인 소재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희생양이 되어왔습니다.




Lucrezia Borgia; 교황의 

서로 아버지 손을 잡겠다며 싸우는 두 오빠에게 아버지의 손을 양보하며 작별인사를 하는 어머니를 돌아보던 침착한 세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는 추기경인 아버지를 따라 바티칸으로 들어가던 중으로, 금발에 파란 눈의 아이는 강인한 턱의 움푹 들어간 선으로 스페인 혈통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는 그렇게 헤어져 살게 되었지만 신분상승이 보장된 고귀한 혈통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펼쳐졌으니 아이들에겐 더없이 잘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추기경의 조카 대우를 받았으나 실제 추기경의 자식들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죠.

여자아이는 Lucrezia Borgia 였으며, 아버지는 훗날 교황 Alessandro VI세가 되는 Rodrigo Borgia였습니다.


Lucrezia와 교황 Alessandro VI (중간), A Glass of Wine with Caesar Borgia, John Maler Collier, 1893

1480년대인 당시엔 성직자에게 파트너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교황 및 추기경들의 자식과 손자들은 바티칸에서 함께 살며 중요한 종교의식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성직자의 딸들은 대게 수녀원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고 수녀가 되었던 반면, 바티칸의 뛰어난 가정교사들로부터 오빠들과 같은 교육을 받으며 교양 있고 우아하게 자란 총명한 소녀 Lucrezia는 아버지가 교황이 되자 많은 귀족들이 탐내는 신붓감이 되죠.

이제는 왕자만이 그녀에게 청혼할 수 있었고, 로마 사회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그녀가 누구와 결혼할지가 매번 화두에 올랐습니다. 주요 가문들은 모두 최고 권력인 교황의 집안과 사돈 맺기를 원했습니다.



바티칸 Borgia 아파트 벽화, by Pinturicchio, 1492-1494

Lucrezia가 14살 무렵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바티칸의 Borgia 아파트 벽화 속 그녀는 Caterina 성녀 -4세기 성인- 의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싼 이교도들을 자신의 지혜와 화술로 설득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버지 Rodrigo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벽화에 가족의 모습을 남겨놓을 수 있었죠.


얼마 전 결혼한 그림 속 그녀의 모습은 시대의 패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패션은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로 유명했죠. 그녀는 패션리더들의 리더였습니다.

아름답게 물결치는 머리는 반으로 묶은 뒤 이마에는 5개의 보석이 달린 Lenza를 두르고 특히 좋아하던 동방 풍의 벨벳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자를 좋아해 무려 10,000개의 모자를 가지고 있었죠. 두껍게 짠 어두운 색 비단에 금실로 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Gamurra¹ 와 분리된 소매는 실크 리본으로 엮었으며, 스페인 풍의 땅에 끌리는 긴 빨간 벨벳 가운으로 한껏 부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소매²는 보통 안감도 하얀색 새틴으로 처리되었고 옷에 달려있는 단추도 금이었습니다. 당시 Gamurra 속에 입는 실크 Camicia(Chemise)는 결혼 품목에도 들어갈 만큼 귀했는데, Lucrezia는 실크와 금실로 만들어진 Camicia가 200개나 되었고 그 가치는 각각 기사의 갑옷만큼이나 비쌌지만 귀한 바티칸의 공주님에게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했죠. 당시 많은 공주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는 견줄 데가 없었습니다.

 


15세기 직물 문양 - 식물 문양

유독 화려함이 눈에 띄는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의상은 동양과 중동의 취향으로, 당시 직물 디자인은 기본에서 벗어나 동방에서 온 크고 강렬한 문양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주로 꽃, 엉겅퀴, 파인애플, 솔방울 등 식물 모양에서 모티브를 얻어 매우 정교하고 명확하게 금·은실로 직조되었죠.

그중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인 모티브는 페르시아에서 종교적으로 불멸과 다산을 상징했던 '석류'입니다. 오스만 제국과의 무역 교류를 통해 이탈리아에 소개된 석류 문양은 이탈리안 직공들에 의해 무한하게 변형되어 거의 100년(15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15-16세기 유럽, 직조와 염색 가공

15-16세기는 이탈리아 섬유 산업의 르네상스로 벨벳과 실크 산업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직물의 생산은 염색 기술 및 직조, 하수 시스템 기술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 성장 발전에 큰 도움이 되죠. 15세기 밀라노에서만 벨벳 가공에 15,000명이 고용되었고, 16세기 베네치아에서는 비단 직조를 위해 25,000명 이상이 고용되어 경제 발전의 주역으로 크게 기여했습니다.



바티칸 Borgia 아파트 벽화 속 Lucrezia Borgia로 추정

이 그림에서 또 주목할 점은 Lucrezia의 머리입니다. 금발과 풀어헤친 머리는 그녀를 대표하는 가장 큰 특징이죠.

베일에 가려졌던 여성의 아름다운 머리는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는데, Lucrezia는 그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결혼한 다른 여인들이 얇은 베일로 푼 머리를 감싸기라도 할 때 그녀는 머리카락에 진정한 자유를 선사했습니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거나 느슨하게 묶는 스타일은 소녀나 약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전유물로, 중세 시대에 이어 기혼 여성들은 틀어 올린 머리를 베일로 감췄는데 머리를 푸는 것은 친밀감을 최대한으로 드러내는 행위로 남편 앞에서만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풀었죠. 결혼 직후 아내들은 남편에게만 열정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3~4년 간 머리를 자르기도 했을 만큼 머리카락은 여성성의 상징이자 유혹의 도구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Lucrezia는 결혼을 하고도 종종 소녀들처럼 자유롭게 풍성한 긴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고 다녔습니다. 그녀의 특징적인 머리인 - 양 옆머리를 잡아 뒤로 묶은 스타일은 당시엔 '고전적인 스타일'로 불렸는데, 바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여신머리죠.


S. Botticelli, Giovanni B., 그림 속 여신의 모습을 한 15-16세기 여인들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게 한 르네상스 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제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용기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는 고전 시대의 미를 다시 불러일으켰죠.

Leonardo, Botticelli, Michelangelo, Giotto, Mantegna, Raphael에 의해 여인들은 그림 속에서 그리스·로마 시대 미의 기준이었던 금발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시인들은 이상적인 여성을 금발의 천사로 묘사했습니다.


Lucrezia Borgia로 추정되는 그림들 속 그녀의 긴 머리

팜므파탈의 자격을 부여해주는 듯 한 이 구불거리고 윤기 나는 금발은 사실 그녀의 노력에 의해 연출된 머리입니다. 금발이나 빨간 머리는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드물었고, 금발머리는 금발로 태어나도 커가면서 점점 어두운 색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미인의 기준은 '파란 눈에 금발'이었기 때문에 염색법은 발달했고, Lucrezia 또한 5일마다 염색을 해주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죠.


달걀흰자, 카모마일, 레몬 및 비밀스러운 혼합물 -소변, 명반, 말발굽 등- 로 이루어진 용액을 5일마다 발라 염색했는데, 머리색을 밝게 해 주는 대신 극심한 편두통을 유발했다고 하니 예뻐지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식 행렬에서도 8일마다 멈춰 서 씻고 말리고 염색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매혹적인 머리 색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으로 머리카락을 표백했습니다.


밀라노 Ambrosiana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Lucrezia의 머리카락

그녀의 아름다웠던 머리카락은 훗날 우정과 사랑 사이의 관계였던 페라라³의 궁정 시인 Pietro Bembo의 개인 문서에서 발견되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서신에 Lucrezia가 사랑의 표시로 매듭진 머리카락⁴을 동봉해 Bembo에게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훗날 로마의 추기경이 된 Bembo와 그녀는 플라토닉 한 사랑을 했고 그가 로마로 떠난 후에도 한동안 서신으로 마음을 주고받았죠.


내 영혼을 온통 괴롭힌 당신의 매우 우아하고도 반짝이는 두 눈..
by P. Bembo


이 매듭진 머리카락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숭배 대상이 되는데, 그녀의 명성에 매료된 시인 바이런(George Byron)은 1816년 밀라노를 방문했을 때 서신들과 머리카락을 보고 대담한 일을 벌이죠. 관리인의 방심을 틈타 재빨리 한가닥을 꺼내 준비해 온 케이스에 넣어 몰래 빠져나온 것입니다.

몇 백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그 부드러움과 윤기를 간직하고 있던 머리카락을 보며 그는 '마치 금과 같다'라며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머리카락에 대한 페티시즘 열풍을 불러일으켰죠.


파스타 - Tagliatelle

그녀의 유명세는 시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스파게티에 버금가는 이탈리아 파스타의 상징인 Tagliatelle(딸리아뗄레)도 그녀와 연관이 있습니다.

Lucrezia의 세 번째 결혼식 무렵, 결혼을 축하하고 신부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요리사가 그녀의 구불거리는 금발을 연상시키는 면 Tagliatelle를 개발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사실 이는 1931년 볼로냐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Augusto Majani의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 먹어왔는지 모를 이미 유명한 넓적한 면을 전설적인 이야기로 포장해 새로운 역사와 명성을 부여해주었고, Tagliatelle는 그렇게 꾸며진 전통을 가지고 현재까지도 지역 파스타 축제에서 그녀의 이름을 놓치지 않고 홍보수단으로 쓰고 있으니.. 현대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명성이 얼만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악의적인 소문의 시작은 어디였을까요?


르네상스가 인간 본능의 아름다운 면을 꽃피운 게 ‘문화예술’이라면 그 본능은 신앙의 힘으로 누르고 있던 인간의 추악한 면 또한 일깨워 '폭력과 음모'가 함께 난무했죠. 거룩한 것들은 조롱당했으며 창녀는 시대 문학의 뮤즈였습니다.


교황 Alessandro VI 세는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사실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이성이 지배하며 종교도 하나의 정치판으로 전락한 시대였던 당시, 가톨릭 교회 내 부패 정도는 도긴개긴이었으므로 이러한 평가는 스페인 출신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에 대한 다소 편파적인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잘못을 안 한 건 아닌지라 그나마 있던 공은 사라지고 과만 남았죠.

한때는 세계 정복을 꿈꾸며 실행에 옮기던 Borgia가문은 결국 패배자였고,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들만이 교황이 되던 시기 스페인 출신의 Rodrigo가 선출되자 눈엣가시로 보던 이탈리아 정통파들이 뒤집어 씌운 프레임이라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Borgia 가문은 적이 많았습니다.


소문의 시작: 왜곡된 이미지와 책임 없는 작가들

그녀의 나이 11살부터 아버지 Rodrigo는 그녀의 결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느 권세가 집안의 자식들이 흔히 그렇듯, 아버지의 정치 체스판 위의 말이었던 Borgia의 자식들 중 유일한 여식⁵인 Lucrezia는 가장 유용하고 능력 있는 말이었죠.


첫 번째 결혼은 밀라노의 공작 집안인 Sforza가(家)였습니다. 밀라노의 섭정으로 자신의 편이 필요했던 Ludovico il Moro는 조카 Giovanni Sforza를 추천했고, 당시 강력했던 Sforza집안과의 결합으로 세력을 넓히고 싶었던 교황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교황과 밀라노의 동맹이 맺어졌습니다. 그렇게 1493년 13살의 Lucrezia와 27살의 Giovanni Sforza의 결혼식이 성사되죠.


Ludovico의 사촌 조카로 밀라노 근처 영지 Pesaro와 Gradara의 영주였던 Giovanni는 낮에는 남자 친구와 사냥을 즐기고 밤에는 부인에게 오지 않는 남자였고, 그저 정치적 관계의 일부였던 둘의 결혼은 그렇게 첫 단추부터 끼워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Sforza집안이 쇠퇴의 길을 걷자 정치적으로 계획이 바뀐 교황과 그의 행동대장인 아들 Cesare는 Lucrezia의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한 뒤 쓸모없어진 Giovanni를 죽이기로 하죠. 이 모든 계획을 듣고 있던 Lucrezia는 아버지와 오빠가 명령을 내린 후 떠나자 옆에 있던 시종에게 외칩니다.


“들었지? 어서 가서 그에게 알려줘!”


전해 들은 Giovanni는 거지로 위장하여 즉시 말을 타고 도망가 겨우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목숨을 살려준 Lucrezia에게 근친을 한다는 더러운 오명을 씌우죠.

교황은 그렇게 달아난 Giovanni를 성적 불능이라 비난하며 결혼의 무효화⁶를 요청했고, 반대하던 Giovanni는 Lucrezia와 그의 가족은 근친을 한다며 맞섰습니다.

이에 Lucrezia는 ‘나는 처녀다’라며 지난 3년간 부부관계는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모욕을 준 Giovanni의 주장에 반박했고, Giovanni는 이탈리아 전체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Ludovico는 땅에 떨어진 조카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수습해주려 교황 입회 하에 공개적으로 남자다움을 보여주는 방법을 제안했으나.. 이 젊은이는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자신이 성적 불능이라 인정한 서류에 싸인을 한 뒤 결혼은 곧 무효가 되죠. 이로써 4년 만에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한번 퍼진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Borgia의 반대파들은 이 소문을 계속해서 널리 퍼트렸죠.

스페인 출신의 교황과 그의 집안을 불만의 눈초리로 보던 이탈리아 정통파들은 Borgia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만들어 퍼트렸고, 이러한 자극적인 루머는 언제나처럼 자가 증식하며 덧붙여지고 부풀려졌습니다.


Lucrezia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책 표지, 포스터

그리고 이런 자극적인 소재를 작가들이 놓칠 리가 없었죠.

Lucrezia Borgia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에 흥미를 느낀 Victor Hugo와 Alexandre Dumas, Donizetti와 같은 19세기 작가들 작품의 소재가 되어 수많은 소설과 오페라, 영화로 재탄생되었습니다.


Borgia 집안은 잔악한 행위를 일삼는 타락의 대명사가 되었고, Victor Hugo로 인해 Lucrezia는 독살범이라는 소문도 추가되어 파티에서 정적들을 독살하고 가족과 근친을 하는 희대의 요녀가 되었죠. 위의 포스터나 책 표지에서 볼 수 있듯 그녀의 이름이 들어가면 여주인공들은 섹스 심벌의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Lucrezia Borgia; 매우 위엄 있는 숙녀

당대에는 '매우 위엄 있는 숙녀'로 묘사되었던 Lucrezia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내린 평가는 '아름답고, 현명하며 쾌활한 성격에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덕에 엄격한 가톨릭 매너를 갖추었고 이를 잘 활용하여 로마의 페라라 대사 Andrea B. 는 그녀를 '신심으로 가득 찬 교육을 받은 우아하고 매력적인 젊은이'로 묘사했죠.


'천사 같은 외모로 독이 든 반지를 끼고 다니며 정적들을 독살하고 아버지 모를 아이를 낳으며 형제와 근친을 하는 등 집안의 부정한 일에 적극 가담한 희대의 팜므파탈이자 악녀'라는 후대에 남겨진 그녀에 대한 평가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외모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실제와 조금은 다릅니다.

그 시대 초상화들이 보통 그렇듯 실제보다는 더욱 아름답게 그려졌고, 후대에 와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팜므파탈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지는 그에 걸맞게 맞춰졌습니다. 마치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여야지만 그런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것에 당위성이 부여되는 것처럼 말이죠.


동시대 사람 Nicolò Cagnolo가 묘사한 Lucrezia의 생김새는 이렇습니다.

 

평범한 , 연약한 외모, 다소  얼굴, 또렷한 , 금발, 하얀 , 다소  입에 하얀 치아, 값비싼 장신구로 장식된 곧고 하얀 


Lucrezia로 추정되는 초상화들

왼쪽의 그림은 Lucrezia를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은 그림에 표현된 가냘프고 천사 같은 얼굴을 한 Lucrezia의 모습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남겨진 대부분의 초상화도 사실 그녀로 추정되는 것일 뿐 그녀의 초상화는 의외로 남겨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죠.


Medaglia di Lucrezia Borgia, 1502 (좌)  ㅣ  Lucrezia Borgia, by Dosso Dossi, c. 1518 (우)

그녀로 알려진 모습은 그녀 생전 만들어진 결혼 기념주화와 판화 그리고 그녀가 죽기 바로 전 혹은 사후 얼마 안 지나 페라라의 궁정화가 Dosso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뿐입니다. 이 초상화는 Lucrezia의 유일한 공식 초상화.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진 생기 없고 창백한 얼굴에 정갈한 옷차림은 최고의 관능미를 뽐내던 여인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Lucrezia Borgia, by Dosso Dossi, c. 1518 (좌)  ㅣ  고대 로마의 Lucretia, by Parmigianino, 1540 (우)

무표정의 꾸미지 않는 머리와 검은 의상의 이 초상화는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청년의 초상화로 간주되어 왔죠. 손에 쥐고 있는 단검과 짧아 보이는 머리로 인한 오해였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살던 여성이 무기를 들고 초상화를 그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의 그림에서 단검을 들고 있는 여성은 -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복수를 위해 단검으로 심장을 찔러 자결한 고대 로마의 Lucretia를 상징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미덕의 아이콘으로 숭배되었던 Lucretia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가 그녀의 사후에 그려진 것이라면 당시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현대 일반적인 평과는 현저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Ferrara; 마음의 안식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으로 페라라 공국에 온 Lucrezia는 이곳에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어 비로소 Borgia가의 딸이 아닌 Lucrezia로 그녀 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페라라는 Lucrezia에겐 피난처와도 같았습니다. Borgia 집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죠. 페라라 공국을 지배하던 Este 집안은 이탈리아의 강하고 고귀한 집안 중 하나로 Lucrezia는 존경받는 공작부인이 되어 페라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을 다합니다.


후계자인 아들 Ercole를 Ferrara의 수호자인 San Maurelio에게 바치는 32살의 Lucrezia, 판화, 1512

기업가적 자질을 지녔던 Lucrezia는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여 수녀원과 궁전을 건설했고, 부지 매입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보석 -3,770개- 및 다른 개인적인 자산을 팔아 장만했습니다. 모짜렐라를 생산하기 위해 버팔로를 키워 페라라 낙농업의 기반을 다졌고 남편이 없을 땐 섭정으로 무기를 관리하고 동맹국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등 뛰어난 통치능력도 발휘했죠.  


4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어려운 시기에 놓였을 땐 어두운 색의 베옷을 입고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었고, 그녀의 희생적인 모습에 페라라 시민들은 희망을 찾았습니다. 평생을 수녀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도와 묵상을 위해 자주 찾았으며 빈곤한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등 공작부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그렇게 페라라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다 8번째 아이를 낳고 패혈증으로 39살의 나이에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을 땐, 남편 Alfonso는 그녀를 그리며 몹시 울었고 페라라 시민들 또한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애도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나쁜 소문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으며, 많은 역사가들은 그녀를 가족의 희생자로 보죠. 그녀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전설보다는 문서에 충실한 연구로 바로 잡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녀가 남긴 727통의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 발간되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밝혀지지 않았던 그녀의 업적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¹ Gamurra - 15~16세기 여성들이 입었던 기본 드레스

² 당시엔 소매가 드레스에 포함되지 않음

³ 페라라(Ferrara) - Lucrezia가 세 번째 결혼으로 인해 공작부인으로 있었던 공국

 Lucrezia의 머리카락은 그들이 나눈 서신 9개와 함께 밀라노 Ambrosiana 도서관에 보관

 Rodrigo에게는 여러 사생아들이 있었지만 바티칸으로 데려간 자식은 Vanozza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셋에 딸 하나

중세 법으로 3년 이내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시 결혼 취소 가능

Lucrezia는 신체검사로 주장을 인정받음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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