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에서 만난 첫 번째 꽃
어떤 꽃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하는지?
그러니까 그날의 나는 마치 상대의 얼굴 사진만 보고 소개팅을 나온 사람 같았다.
이름: 보춘화
약속 시간: 3월의 어느 날
만날 장소: 국립세종수목원 희귀특산식물전시온실
얼굴은 SNS 사진으로 미리 확인. 지역 신문에도 언급된 걸로 봐서는 유명한 친구인 듯?
하지만 얼굴 사진만 보고 나간 소개팅에서 사진과는 미묘하게 다른 사람을 만날 경우가 대부분인 것처럼 나와 보춘화의 만남도 그러했다. 아니, 분명 얼굴 그러니까 꽃은 사진과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꽃 앞에서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 이 꽃이 내가 사진으로 본 그 꽃이 맞나?'
차라리 소개팅이었다면 "실례지만 보춘화 씨가 맞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물어본다 한들 식물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약간 색깔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사진 속 꽃보다 너무 수수한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이 사이즈가 맞나? 자세히 안 보면 꽃인지 눈치도 못 채고 지나갈 정도로 초록색인데? 사무실 책상에서 주로 보던 그 난꽃들이랑은 많이 다른데? 왜 줄기 하나에 꽃이 달랑 하나 피어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상대를 한참 바라보았다. 주선자(수목원 SNS)에게 물어보면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할 게 뻔했다. 일단 사진을 찍어 모야모(식물 이름을 알려주는 앱)에 확인해 보자! 가뜩이나 키도 작은데 고개까지 살짝 숙인 난초의 꽃.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겨우 사진 한 장을 찍고 일어설 때 갑자기 어디선가 직원 한 분이 나타나 말을 건넸다.
"꽃은 잘 보셨어요? 사진이 잘 나오던가요?"
헉, 어디에서 나오신 거지? 확신이 없어 오래 바라보던 모습에 보춘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게 분명했다. 당황하는 나에게 그분은 색이 약간 다른 꽃이 핀 보춘화도 있다고 보여주셨다. 그렇다, 수목원에는 단 한 포기의 보춘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보춘화'라는 이름표가 꽂혀있는 자리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찍은 사진 속의 꽃도 다행히 보춘화가 맞았다.
개장 초기의 수목원, 게다가 희귀특산식물전시온실까지 보춘화를 보러 굳이 찾아온 관람객이 반가웠던지 그분은 보춘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왜 보춘화가 희귀특산식물전시온실에 있는지, 희귀특산식물의 정의까지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수목원이 아직은 볼 게 별로 없는 것 같죠?
그런데 오늘 이렇게 심은 식물들도 조금 지나면 확 달라져요, 그럼요.
자주 오셔서 이렇게 식물 자라는 모습만 봐도
정말 재미있을 겁니다.
자주 오세요.
자주 와서 달라지는 걸 보세요.
처음 듣는 이름의 난초, 하지만 솔직히 기대도 관심도 없었다. 축구장 90개 크기로 유명한 넓은 수목원은 그저 걷기에 좋았을 뿐. 한 바퀴 돌면 만 보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수목원 SNS며 지역신문에 대대적으로 개화 소식이 알려졌던 보춘화라는 꽃을 겸사겸사 보고 오면 되겠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을 뿐이었다.
한 20년 지나면 모를까 넓기만 하고 볼 게 없다고 생각했던 국립세종수목원.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수목원에 볼 게 없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숲을 보아도 나무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 꽃을 보아도 '꽃이네'에서 끝나는 사람, 모든 것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사람. 궁금함도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게 재미가 없었던 걸까.
"자주 오면 재미있을 겁니다." 보춘화를 보며 들었던 이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 가슴에 훅 들어왔던 것인지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난 그 순간 무엇을 상상했던 것일까, 무엇이 보고 싶었던 걸까. 수목원이 순식간에 초록으로 채워질 것도 아닌데도 막연히 설레었던 마음을 여전히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막연한 설렘이 계속계속 수목원으로 향하게 했다.
봄을 알리는 꽃 보춘화는 그렇게 나에게 시작을 알리는 꽃이 되었다. 그날 이후 이어진 발걸음과 수많은 첫 만남들의 '시작'이 되어준, 수목원에서 만난 나의 첫 번째 꽃.
띄엄띄엄 한 포기씩 자라던 보춘화는 이제 제법 무성해졌다. 해가 지날 때마다 기세가 좋아진다. 꽃대가 우르르 올라온 모습을 여전히 쭈그려 앉아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자면 "어머, 이게 꽃이었어요?"하고 지나가던 분들도 멈춰 서서 함께 눈높이를 낮추곤 한다. 이 분들도 보춘화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리게 될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