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수의 어느 날 [37매]
[첫 한 줄]
수서역에 전자담배전용 흡연부스가 있다. 놀랐다.
[기]
소수에게는 적이 많다. 전투 방식을 비폭력과 설득으로만 고정시켜야 할 뿐, 소수는 싸워야 하는 대상이 여럿이다. 나와 맞은편에 선 이와도 싸워야 하며, 심지어 나와 같은 편이지만 입장과 생각이 다른 이와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소수는 수가 적어질수록 적이 늘어난다. 민주주의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수가 늘어나면 적도 줄어드니까. 또한 일정 이상으로 수가 늘어나면 적은 더 이상 줄지 않고 뚜렷해지는 것도 다수결 제도의 특징이다. 이 역시 반대로 말하면, 수가 일정 이상으로 줄어들면 우리 역시 또렷해진다는 뜻이다. 군체가 아닌 객체의 집합에서는 100은 완성되지 않는다. 어떠한 기준으로 나눠도 두 부류 이상, 아무리 극단적이어도 99대1 너머로 건너갈 수 없다. 인간 역시 객체인 이상 모든 이의 생각이 통일될 수 없다. 어떤 나눔이어도 늘 소수는 있다. 그 소수가 어떤 식으로 뚜렷해지느냐, 그 방식의 차이뿐이다. 그에 나는 공화정, 민주주의, 다수결제에서는 소수든 다수든 집단의 의사가 또렷해지는 방식은 하나뿐이라고 규정한다. 평화적인 설득. 오직 이것뿐이다. 그래서 누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행동하든 그 방식과 과정이 폭력적이거나, 혐오적이거나, 비난과 모욕을 동반하고 있으면 지지하지 않는다. 모든 폭력적 방법은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아주 짧게만 용인될 뿐이다. 이조차 용인이면서 공감이지, 동감하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즉, 그 폭력적인 과정이 ‘우리 좀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극소수의 절박한 외침 같은 경우에만 아주 잠시 짧게 ‘그럴 만했다’ ‘뭐 다른 수가 없었겠다’라며 용인되고 공감될 뿐이다. 민주제에서 공권력을 제외한 폭력은 마치 폭죽 같은 것이다. 폭탄 같은 화력이 없어야 하고, 소이탄 같은 지속력도 있으면 안 된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화려하게 터지지만 불꽃이 오래 이글거리지 않고, 어디에 옮겨 붙지 않고, 누구를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런 폭죽 같은 폭력만이 우리가 용인해야 할 최저선이다. 난동과 파손, 상해 같은 물리적 요소도, 혐오와 비난, 모욕 같은 언어적 요소도, 미러링과 세뇌, 방해 같은 행위적 요소도, 그에 지속과 반복이 생기는 순간 그저 다양한 모습을 한 폭력일 뿐이다.
[승]
오랜만에 수서역에 갔다. 고속열차에서 내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함이었다. 지하 연결구를 통해 곧장 넘어가도 되지만 열차를 오래 타서인지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지상으로 올라가 주차장으로 연결된 출구로 나가니 멀리 흡연부스가 보였다. 근데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작은 쪽은 여성전용부스인가 싶어서 가까이 가다가 글씨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작은 부스 유리벽에는 이런 글씨가 붙어있었다. ‘전자담배전용’ 흡연부스. 허! 육성으로 이 소리가 나왔다. 도대체 누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
담배에 익숙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싶기도 할 것이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하는 담배를 크게 나누면 두 종류가 있다. ‘연초 담배’와 ‘전자담배’다. 그중 전자담배는 또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궐련형 전자담배’와 ‘액상형 전자담배’다. 나는 지금 시대 담배는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예전부터 있었던, 담뱃잎을 얇은 종이로 말아 피우는 고전적인 궐련을 보통은 ‘연초 담배’라고 부른다. ‘연초 담배’는 라이터건 다른 불이건 직접 붙여서 담뱃잎과 종이를 함께 태우는 방식이다. 궐련이든 시가든 직접 불을 붙여 태우면 뭐든 ‘연초 담배’다. 맛과 ‘목넘김’이 강하지만 그만큼 피우는 당시든 피운 후든 냄새도 강하다.
그리고 얇은 종이로 담뱃잎을 말아놓은 제조법은 동일하지만 피우는 방식이 다른 ‘궐련형 전자담배’가 있다. 궐련형 전자담배는 전자기계를 통해 담뱃잎을 찌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 기계에 따라 담뱃잎 일부가 조금 타기도 하지만 많지 않다. 그리고 담뱃잎을 말아놓은 종이와, 그 종이를 붙여놓은 접착제를 태우지 않는다. 그래서 연초 담배에 비해 맛과 목넘김은 약하지만 대신 냄새가 훨씬 덜하다.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45와 10로 여긴다. 연초 담배의 목넘김과 냄새가 100이라 가정할 때, 그에 비교하여 궐련형 전자담배의 목넘김은 50, 냄새는 10정도로 줄어든다고 느낀다. 절반과 1/10이다. 이 부분이 흡연자가 어느 담배를 선택할지 영향을 준다. 누군가는 냄새가 줄어든 것이 좋다, 재가 떨어지지 않아 피우기 간편하다, 건강에 덜 나쁘다, 등등의 이유로 전자 담배를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냄새는 별 문제가 아니다, 목넘김이 너무 적어 아쉽다, 기계를 사야 하는 초기 비용이 과하다, 뭐든 담배는 건강에 다 안좋다, 등등의 이유로 계속 연초 담배를 고집할 수도 있다.
나는 목넘김은 분명 아쉽지만, 절반으로 줄어든 아쉬움보다 냄새가 1할로 줄어든 만족감이 훨씬 높아 작년부터 전자담배로 바꿨다. 아주 가끔, 반년에 한 번쯤 예전에 피우던 연초 담배의 맛과 목넘김이 그리워 누군가의 연초 담배를 얻어 피울 때도 있다. 하지만 연초 담배를 끌 때면 늘 후회한다. 입과 숨에 남는, 특히 코 안쪽에 오래도록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연초 담배 특유의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흡연자로서 이 부분이 참 재밌었다. 나는 20년 넘게 연초 담배를 피워왔는데, 고작 1년을 피우지 않았다고 연초 담배 냄새가 이리도 괴롭게 느껴질 것이라 예상 못했다. 심지어 담배를 아예 끊은 것도 아니고, 궐련형 전자담배를 꾸준히 피우고 있음에도 연초 담배 냄새가 괴로웠다.
그리고 궐련형 전자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작년부터는 자주 괴로웠다. 체감 상 아직 전자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보다 연초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가 훨씬 더 많다고 느끼니까. 흡연구역에 가면 연초 담배가 훨씬 많으니까. 담배를 피우러 흡연구역에 가는 흡연자로서 흡연구역에 가지 않는 비흡연자보다 담배 냄새를 맡게 되는 일이 훨씬 길고 빈번하니까. 그래서 지난 1년 반 동안은 궐련형 전자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면서도 연초 담배에 대해서는 비흡연자인 듯한, 마치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간극 사이에 낀 ‘검은 고양이’같은 상태였다. 묘한 괴리감과 기시감과 난처함에 둘러싸인 전자 담배 흡연자. 물론 ‘액상형 전자담배’만 피우는 하얀 고양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괴로웠을 것이다. 우리가 100-10인 90의 냄새에 괴로워할 때, 그들은 100+10인 110의 냄새로 괴로웠을 테니까. 반면 연초 담배를 피우는 삼색 고양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싶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연초 담배를 피울 때는 전자 담배를 피우는 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내 몸과 머리카락과 손에서 풍기는 담배 냄새가 담배를 피우는 누구에게나 나는 기본적인 ‘담배향’이었으니까.
그래서 궐련형 전자담배와 액상형 전자담배를 같이 피우는 흡연자로서, 사실 예전부터 최소한 ‘연초 담배’와 ‘전자담배’를 피우는 장소를 구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꺼내 말하지는 못했다. 우리 흡연자는 지금도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전쟁 중이니까. 이미 오래 무엇인가와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한참은 더 싸워야 하니까. 그렇게 나아가는 방향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로 또 다시 흡연자를 나누고 갈라서 서로 다투도록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초 담배와 전자담배의 차이점은 늘 불감청고소원한 주제였다.
[전]
이야기는 다시 수서역으로 돌아온다. 전혀 예상 못한 장소에서 예상 못한 ‘전담전용부스’를 발견한 나는 육성으로 ‘허!’ 소리를 내뱉었다. 흡연구역부스는 여전히 천장이 막혀있고 과하게 아담한데, 그보다도 더 조그마한 이 부스가 여기 서있으려면 분명 여러 단계와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누군가 연초 담배와 전자담배를 구분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어딘가에 제안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누군가가 제안을 허가해줬을 것이고, 그래서 실제 집행되어 설치해야만 나는 이 부스를 실물로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서역의 전담전용부스는 그 단계를 모두 거쳤다는 것이다. 만약 그 제안자와 허가자가 흡연자라면, 나는 그들을 칭찬할 것이다. 제안자와 허가자가 동일인물인지, 서로 다른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혹은 그들)가 만약 내 앞에 있다면 벌떡 일어나서 열렬히 박수를 칠 것이다. ‘아니 천재세요?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라고 침을 튀기며 말할 것이다. 내가 감탄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다. 어떠한 공론화나 갈등 없이, 그저 필요성에 의해 스리슬쩍 만들어 놓은 그 과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만약 이런 부스를 만들기 전에, 흡연자의 의중을 물어본다며 공론화를 먼저 했다면 어땠을까. 전자담배 이용자는 분명 환호하며 찬성했을 것이고, 연초 담배 이용자는 반대할 명분은 없지만 불쾌해했을 것이다. ‘같은 흡연자끼리 더럽게 유난떠네’ 혹은 ‘전담전용부스 만들 예산과 공간이 있으면 부족한 흡연구역을 더 늘리던가 아니면 기존에 있는 부스를 넓혀주던가 해!’라고 반응했을 수도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을 거치냐에 따라 같은 결과임에도 다른 감정과 반응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반면 이렇게 조용히, 슬쩍 전담전용부스를 만들면 어떨까. 일단 전자담배 이용자는 여전히 환호하며 찬동할 것이다. 그리고 연초 담배 이용자도, 그리 큰 거부감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나눠놓으면 그만큼 자리가 넉넉해지잖아.’ ‘안 그래도 흡연 인구에 비해 흡연구역도 턱없이 부족하고 부스도 좁아 답답한데 여유 공간 생기면 좋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만약 여전히 연초 담배 이용자였다면, 비흡연자와 같은 흡연자 모두에게 차별 받았다는 악감정보다 어쨌든 당장 널널하게 부스를 이용할 수 있어서 이익이라는 순감정이 더 앞섰을 것이다. 그래서 침을 튀기며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흡연자인 나도 풍문으로 건너 듣지 못할 정도로 공론화 없이 조용하게 전자담배부스를 제안하고 허가하고 집행한 누군가에게. 천재다. 나는 이런 이를 천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만약 이 제안자와 허가자가 비흡연자라면, 그럼 그(혹은 그들)은 천재가 아니라 천사다. 비흡연자인 그 역시 어디선가 연초 담배 냄새를 맡으며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거기서 사회 풍조가 그렇듯 ‘흡연자는 절대악! 전부 나쁘고 모자란 인간들!’이라고 쉽게 손가락질하며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흡연자인 그가 이런 제안을 했다면 보통 사람과 다르게, 그 뒤로 어떤 생각 하나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비흡연자로서 연초 담배 냄새와 전자 담배 냄새를 모두 맡아봤는데, 차이가 컸어. 전자담배에 비해, 연초 담배 냄새가 훨씬 안 좋더라. 그러면 혹시 전자 담배를 피우는 이가 연초 담배 냄새를 맡으면 흡연자임에도 나처럼 괴로울까?’라는 생각. 그래서 아마 주변 전자 담배 이용자에게 물어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다’라는 답을 들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기어코 하나의 생각을 더 연결한 것이다. 사회 분위기와 맞지도 않고, 본인과도 하등 관계가 없을 그 생각을. ‘전자 담배 이용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초 담배 냄새가 괴로우면, 그러면 우리보다 더 괴롭지 않을까? 우리는 가끔 잠시 맡지만, 그들은 담배를 피우러 갈 때마다 매번 오래 맡아야 하잖아.’라는 생각. 그리고 거기서 ‘자기 책임이지! 누가 칼 들고 담배 피우라고 협박함?’ 하며, ‘지팔지꼰’이나 ‘누칼협’이라 깔깔 비웃거나 모든 흡연자를 싸잡아서 모욕하지 않고 결국 마지막 생각까지 이어붙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초 담배 냄새를 맡고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모든 흡연자의 의무인가?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나?’라는 생각. 비흡연자 머리에서 떠오른 '흡연자는 어떻지?'라는 그 생각.
그래서 제안자와 허가자가 만약 비흡연자라면, 나는 그를 천재가 아닌 천사라고 생각한다. 흡연자였다면 착하고 대단한 사람이지만, 비흡연자라면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선함’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음에도 착한 것’. 그리고 ‘훌륭함’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다 많은 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대단함’.
물론 이 전담전용부스의 제안자와 허가자는 아마 흡연자일 것이라 추측한다. 요즘 시대에 비흡연자가 흡연자의 권리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리고 그런 세태와 풍조는 흡연자 스스로가 조장하고 지금도 방조하고, 심지어 가중시키고 있으니 달리 탓할 이도 없다. 기껏 해봐야 싸잡아 비난하고 과하게 모욕하는 것에만 조금 소리를 낼 뿐, 왜 우리를 더 생각해주지 않느냐며 비흡연자의 ‘배려’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현재 비흡연자는 흡연자에게 너무 많은 '부당한 피해'를 받고 있으니까.
[결]
2025년 04월 05일 18시 40분쯤에 있었던, 벌써 사흘이나 지난 일이 왜 가슴 속에 계속 남아있을까. 당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어둑어둑한 저녁에, ‘전자담배전용’이라는 여섯 글자를 본 나는 왜 비를 맞으면서도 그 자리에 멈춰 섰을까. 오랜 고민 없이도 답은 금세 나왔다. 흡연자로서, 오랜만에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간 흡연자는 꽁초를 바닥에 버리건 버리지 않건, 침을 뱉건 뱉지 않건,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건 피우지 않건, 단지 흡연자라는 이유로 모두 싸잡혀서 절대악 취급을 받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어느 단 한 사람의 흡연자에게도 권리는 없고 비난과 의무와 책임만 있는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흡연자의 다수가 잘못을 하고 있으니 그 안의 큰 다수든 작은 소수든 누구에게도 과하게 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흘러갔으니까. 그리고 그런 기조를 억울해하는 나마저도 일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느꼈으니까. 그래서 재떨이를 들고 다니며 꽁초를 버리지 않고, 걸어가면서 피우지 않고, 횡단보도든 정류장이든 사람이 모여있는 곳을 피하고, 바닥에 침을 뱉지 않는 등 법을 전부 지키면서도, 그래서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는 주지 않는 흡연자라고 자평하면서도, 그런 대우에 강하게 항변하지 못한 채 오래 살아왔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흡연자의 권리’에 대해 누군가 고민하고, 고민에서 끝나지 않고 제안하고, 더 나아가 허가까지 돼서 실행된 결과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작고 사소할 수 있는 그 ‘전담전용부스’가 내게는 아주 커다랗게 다가왔나 보다. 마치 짧게는 2012년에 대중이용업소 금연법이 시행된 이후로, 길게는 2000년대 한 지역을 통으로 금연구역으로 지정한 이후로 이 사회에서 처음으로 흡연자의 권리를 인정받은 것처럼.
우리 흡연자도 사람이고, 흡연자에게도 비난 받지 않을 인권이 있고, 주어진 의무만큼의 권리가 있다. 다만 흡연하는 사람의 큰다수가 다른 이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에 그간 우리가 원래 가져야 하는 권리를 빼앗겼고, 그 부당함을 주장하지 못했다. 흡연자를 그리 대하는 비흡연자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아쉬웠다,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흡연자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실상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 흡연자'에게 더 화가 나는 이는 비흡연자보다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은 흡연자'다. 마치 소위 '딸배'라고 불리는 이륜차 배달원에게 더 화가 나는 이는 오토바이를 몰지 않는 일반인이 아니라 법규를 지키며 타는 '라이더'인 것처럼. 또는 전철 승강장을 점거해 출근을 방해하는 장애인에게 더 화가 나는 이는 그것을 뉴스로 접한 비장애인이 아니라 그런 행동이 잘못됐다 여겨서 하지 않는 다른 장애인인 것처럼. 비흡연자는 부당한 피해 하나만 받지만, 같은 흡연자는 다른 흡연자에게 부당한 피해를 받는 것과 동시에 비흡연자에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비난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억울함을 강변하지 못했다. 그저 큰 다수인 흡연자를 백안시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설득해야 했다. 민주주의에서 모욕과 비난으로는 무엇도 얻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바닥에 있는 꽁초 전부 네가 버렸지? 너도 어차피 바닥에 버릴 거잖아?’라는 비흡연자의 멸시어린 눈길에 억울해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점점 바뀌는 중이고 결국 바뀔 것이라며 그들도 설득해야 했다. 다수결제에서 난동과 폭력으로는 어느 마음도 움직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많이 지치고 마음이 다쳤나 보다. 스스로 얼마나 지치고 다쳤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작은 부스가 반대급부적으로 준 감동의 양을 보니, 아마 상처의 깊이 역시 그와 비슷하겠구나 싶다.
[한 줄 요약]
수서역에 전담전용부스가 있다. 놀랍고 고마웠다.
2025.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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