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함께 간다.
"얘들아. 살다 보면 큰 변화들을 겪게 되기 마련이야. 우리 가족이 홍콩에 올 때처럼, 그런 변화들이 오는 거지. 우리 가족에게 곧 큰 변화가 올 것 같아."
주일 저녁 가족회의를 열었다. 정기적인 가족회의는 없지만, 가정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가족회의를 한다. 약 4년 전 홍콩에 오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도 가족회의를 했다. 그때 큰 아이는 만 6살, 작은 아이는 만 3살이었다. 홍콩에 왜 가게 되었는지, 언제 어떻게 가게 될 것인지,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약 15분에 걸쳐 잘 설명해 주었다.
"자, 이제 질문 있는 사람?"
아들이 말했다.
"아빠, 그런데 우리 홍콩 왜 가?"
아내는 깔깔대며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나 또한 허탈한 마음과 함께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곳 국제학교는 보통 대기 지원자들이 많아서 매 학기마다 재학생들에게 다음학기 등록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등록금을 미리 선납하게 한다. 큰 아이는 오는 6월에 Primary School을 졸업하고 9월부터 Secondary school로 가게 된다. 본인은 당연히 Secondary School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 12월 초, 학교 측에서는 Secondary School에 등록할 것인지 물어왔다. 등록을 위해서는 첫 달 학비를 선납해야 했다. 국제학교에서는 한번 낸 등록금은 보통 돌려주지 않는다. 곧 퇴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음 일자리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었다. 그리고 결국 등록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2주 전, 학교에서 메일이 왔다. 6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Secondary School을 방문해 2일간 체험해 보는 Transition day 행사를 갖는다는 공지 메일이었다. 진학을 하는 학생들은 모두 가야 하고, 진학하지 않는 학생들은 Primary School에 남아서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과연 몇 명이나 남을까? 대부분은 다 행사에 참여할 텐데, 딸이 느껴야 할 소외감이 걱정됐다. 딸아이는 아직 나의 사정과 홍콩을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뜩이나 민감한 나이에 아이가 어떻게 느낄지 걱정됐다. 지금 나의 상황, 가족의 상황을 굳이 오랫동안 비밀에 부칠 생각은 없었지만, 언제가 아이들에게 얘기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일까 늘 고민했었다. 그리고 이제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다가왔다고 생각됐다.
"우리 홍콩 떠나?"
큰 변화가 있을 거라는 아빠의 말에 큰아이가 직감한 듯 물었다. 사실 최근 몇 달 동안 우리는 앞일을 모른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응.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너 졸업 때까지는 있으려고 생각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홍콩도 싫고 한국도 싫어. 다 반반이야."
말하는 딸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홍콩도 좋고, 한국도 좋아가 아니라 '싫어'라는 표현이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음을 의미했다. 충분히 이해한다. 지난 3년여 동안 학교를 두 번이나 옮겼다. 이제 잘 적응해서 단짝 친구도 생기고 또 많은 친구들과 하루하루 즐겁게 다니고 있는데, 그리고 당연히 Secondary School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럽고 상실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반반'이라는 말은 한국도 받아들일 수는 있다는 뜻이었을까? 자의적으로 희망을 걸어본다. 아빠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좀 더 돌려서 표현해야 했을까? 너무 떠날 거라고 딱 못 박지 말아야 했을까? 지금이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을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31~34)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8~9)
말씀을 나눴다.
"얘들아, 아빠가 너희에게 오늘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마음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음, 그렇기도 하지. 그런데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야. 더 큰 이유가 있어."
"......"
"이번 일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야. 큰 변화지. 너희가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어.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께서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가 다 같이 어떤 길을 열어 주실지 기도하기 바래."
"기도 했는데 안 들어주시면 어떻게 해?"
"기도해 봐.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셔."
아이들에게 한 말이지만,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응답에는 3가지가 있다. Yes, No 그리고 Wait. 어떤 길로 어떻게 인도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렇듯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큰 아이는 이제 11살이다. 아이들은 보호받고 안전한 환경에서 양육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것이 가족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차단한 채 늘 즐겁기만 하고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방어막을 쳐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도 엄연한 가족의 구성원이기에 아이들이 부담할 수 있는 만큼 함께 가족의 짐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 아빠의 예정된 실직, 알 수 없는 앞날, 불가피한 변화로 다가오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아이들이 믿음과 기도로 이겨내길 바란다. 말씀이 어떻게 삶에 역사하는지 인생 경험을 통해 배우고 속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바란다.
학교 측에서 연락이 왔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따님은 Transion day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참여하세요."
Transition Day 행사에 대한 공지를 받자마자 학교 측에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었다. 사정 상 홍콩을 곧 떠나게 됐고, 그래서 Secondary School 등록을 안 했다고, 하지만 딸아이가 Trasition Day에 참석해서 홍콩을 떠나기 전에 친구들과 더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을 주시면 정말로 좋겠다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정말로 감사했다.
"아빠, 나 성경책 가져갈 거야."
"학교에? 이거 무거운데?"
"응, 나 읽을 거야."
작은 아이가 학교에 성경책을 가져가겠단다. 하교 후 보니 성경책 책갈피 위치가 옮겨져 있다. 아이가 성경책을 읽은 것 같다. 가족회의 때문이었을까?
젊은 시절 결혼에 대해서 이런저런 강의도 듣고 책도 읽고 했었다. 언젠가 들었던 한 강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너무 조건 보고 결혼하지 마세요. 조건이란 살다 보면 변하는 겁니다. 인생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부자도 가난해질 수 있고, 건강한 사람도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 살다가 어떤 사고를 당할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조건을 보고 결혼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재산이 없어지고 경제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면 결혼한 이유가 없어졌는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정말 좋은 부부란, 그런 어려움이 왔을 때 기꺼이 함께 이겨나갈 수 있는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건 보다도, 내 배우자가 어려울 때 함께 의지하며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인가, 그걸 보세요."
내 아내는 나보다도 더 흔들림 없이 나를 지지해 주고 있다. 이제 조금의 짐을 아이들에게도 나누어 줬다. 이렇게 함께 갈 수 있으면 이미 좋은 가정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