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 년 동안 병원생활을 하는 너를 위해 아빠는 울고 또 웃는다.
지면을 맞고 허공에 튀어 오른 반짝이는 물방울 사이로 네 얼굴이 보인다. 내 사랑. 나의 유일한 아이 기쁨. 작디작은 물방울 사이로 흘끗 보인 네 얼굴은 이내 활짝 웃고 있었다. 십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너는 다행히 네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 주었다.
동그란 빨간 테의 주인공. 가끔은 삐뚤빼뚤하게 안경을 걸치는 탓에 아빠 손길이 필요한 솔직한 네 모습이 보인다. 불편한 네 몸이 힘겹게 너를 받쳐주고 있는 걸 알기에 말없이 네 안경을 고쳐 씌워준다. 지난 십일 년 참으로 고생 많았다. 아들아.
밤이 되면, 칭얼거리는 네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제법 말주변이 늘어난 너는 내게 말한다.
"아빠 병원 이제 그만 가고 싶어. 너무 힘들단 말이에요. 정말 병원 그만 가고 싶어요...
아빠는 내 상황이 안 돼 봐서 모를 거예요. 얼마나 힘들다고요... 아빠 나 치료받는 거 참는 거예요. 내 마음 알아요? 학교 다니는 것까지 너무 힘들어요. 쉬고 싶고 자고 싶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요."
애원하는 네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모르지 않는 네 마음이 한 번 더 귓가를 때릴 때마다 부모의 마음은 그대로 찢겨 나간다. 그럴 때면 엄마의 퀭한 두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더 크게 확대되어 보인다.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네 모습 역시 유난히 크게 보인다. 할 말이 없다. 뭐라고 해주고 싶은데 딱히 해줄 말이 없다.
두 사람을 재울 시간이 왔다. 또다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왔다. 내 마음이 심장을 때리는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내 가슴을 후려 치는 밤, 네 엄마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잠은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불면증이 생긴 지 십 년이 훌쩍 지나갔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다시 갔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듯 해마다 고민의 색깔 역시 바뀌어갔다.
첫 해는, 옮겨야 할 새로운 병원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두 번째 해엔, 보험회사와 다투느라 백일 밤을 하얗게 새웠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나의 날 선 발톱을 드러내야 했다.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는 아비의 모습을 보여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결코 쓰러지지 않는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마지막에 원만히 합의되었다. 내 정성을 알아주었던 걸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해도 가하지 않고 그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를 넘겨서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병원문을 밤마다 나서야 하는 삶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흐느꼈던 때가 부지기수였다. 아빠와 헤어지는 아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강산도 변할 열 번째 해를 그렇게 지난해 떠나보냈다.
이제는 너도 엄마도 내 곁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지만, 엄마 목소리엔 여전히 피곤이 서려있었다. 잠이 들면 여지없이 얕은 신음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끙끙 대며 앓는 네 엄마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내 잠은 달아나버린다. 마음이 왜 이리 아픈 건지.. 그 옆에 누워 꿈나라로 간 너조차 비슷한 시간에 꿈속에서 흐느껴 운다. 꿈을 꾸며 우는 건데, 소리 내어 우는 너를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두 컴컴한 밤 속에 우는 너를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몸을 곧추 세워 곧장 너에게로 살금살금 기어간다. 혹시 네 엄마나 네가 깰까 봐. 조심스레.
'아들아. 무슨 악몽을 꾼 거니? '무엇이 너를 이토록 힘들게 만든 거니?' 아빠는 얕은 잠에서 깨어 여전히 우는 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사이 피곤에 찌든 엄마는 미동도 없이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다. '무슨 꿈을 꾼 거니, 아들아.' 한 번 깨버린 이후, 아빠는 그날 밤도 하얗게 지새우는 불침번을 서게 된다.
나 홀로 깨어, 보이지 않는 앞 날을 대비해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충동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걸 지켜본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두 눈 부릎 뜨고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을 헤매어야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밤을 헤쳐 나가는 듯한 느낌이 온몸을 덮칠 때면 나는 나에게 말을 건다. 아들과 아내를 지키기 위한 불침번이기에 괜찮다고 나를 다독인다. 여전히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그렇게 한 밤 중을 서성인다.
간 밤이 지나갔다. 지난밤 잠에 들기 전, 우리는 평소처럼 세 가지 감사 제목을 나눴다. 벌써 1년 넘게 반복되는 감사제목 나누는 시간이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돌아왔다. 감사 제목을 분명 셋이 나눠 가졌는데 우리의 기쁨은 어느새 세 배가 되었다. 기쁨 이가 나누는 기쁨 역시 나눌 때마다 배가 되어 있었다.
엄마 세 가지, 아들 세 가지, 아빠 세 가지, 우리는 매일 육하원칙 구조로 문장을 만들어 감사 제목을 나눈다. 밤이면 밤마다, 힘겹게 보낸 하루의 끝자락에서 지난 하루의 감사를 캐낸다.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던, 침잠해 있던 감사를 흔들어 깨운다.
"아빠랑 엄마랑 지금 이 시간에 누워서 감사제목 나누는 게 감사해요."
"엄마는 우리 기쁨 이가 병원 생활하면서 많이 힘든데도 불구하고, 활짝 핀 꽃처럼 환하게 웃어주는 게 감사해."
"아빠는 우리 기쁨이 코피 흘릴 만큼 피곤하고, 어려운 상황인데도, 밤마다 가요 들으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 보는 게 그렇게 감사하네. 지친 너를 달래는 방법을 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감사해."
잠에 들기 전, 악동 뮤지션의 "다이노소어(Dinosaur)"를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아들 목소리다. 볼 빨간 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 가사가 이어 들린다. 어떻게 찾았는지.. 어디서 찾았는지.. 작디작은 손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명곡들을 용케도 잘 찾아낸다. 가수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 곡들을 다 찾아낸 거지? 아마도 아이 마음속 내비게이션, 알고리즘 덕택인 듯싶다.
마지막으로 디즈니 영화 모아나의 "나 언젠간 떠날 거야."를 부르며 아이는 자신만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래, 그렇게 될 거야. 너만의 세계를 찾아 너는 그곳으로 마침내 먼 항해를 떠나게 될 거야.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하늘 맞닿은 저곳이 날 불러
그 누구도 모르는 곳
바다에 나가면 바람이 도와주지
난 갈 거야
떠날 거야! "
-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Moana), "나 언젠가 떠날 거야."
"네 마음이 보여. 투명하고 맑은 네 마음이 그대로 내게 보여."
아들아. 그간 많이 힘들었지. 여전히 너무 자주 힘겹지. 그럴 만 해. 그럴 수밖에 없어.
또래 아이들 중에 가장 작은 체구를 지닌 너, 삶의 무게가 너를 짓눌러 그런 거겠지. 충분히 자야 하고, 충분히 쉬어야 하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계절을 쉼 없이 회전해야 하는 네 숙명이 널 그렇게 만든 거겠지.
아빠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단다. 아빠가 십 년 넘게 병원을 다녀야 했다면 아빠 표정은 어땠을까? 너처럼 여전히 힘차게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을까? 너처럼 밤이면 밤마다 그렇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일 년 넘게 이어지는 너의 큰 절이 어젯밤에도 아빠를 울렸어. 너 잠들고 나니 통 잠이 오지 않더라. 너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난 이후 그 모습이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았어. 나의 천사 기쁨 이가 아빠 마음 알아주고, 아빠 좋아한다고 시키지도 않은 큰 절을 해줄 때마다. 아빠는 네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엄청 커다란 사랑의 빚.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 말이야.
네 말처럼 너 언젠가 떠날 거야. 아빠는 지금도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단다.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내가 빛나는 소년, 널 볼 때마다 내 마음속 기대감이 자꾸만 커져. 어쩌지. 이를 어쩌면 좋지.
밤마다 깔깔 거리며 춤추는 너. 그 곁에서 장단 맞추는 나. 피치를 높이고, 흥얼거리는 동작이 크레셴도처럼 커져 갈 때마다 서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는 너와 나. 우리는 서로 알지. 지금이 어떤 순간이란 걸.
멀리서 그 모습 흐뭇하게 바라보는 네 엄마가 보일 때면 너는 다시 고개를 돌려 흥얼거리며 너만의 춤을 추지.
기쁨아, 네가 머금은 온기와 환한 깊이는 언젠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자라날 거야. 향기로운 꽃이 어두움을 밀어내듯, 너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니까. 피고 지는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고, 결국 열매가 되어 너를 단단하게 만들겠지.
빛나는 소년, 너의 삶은 분명 놀라운 이야기로 이어질 거야. 우리가 함께 쌓아가는 하루하루의 추억들은 어느새 너의 날개가 되어 줄 거고. 그 날개는 너를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갈 거야. 바람을 타고, 빛을 따라, 네가 가야 할 곳으로 나아가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그 길 끝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을게. 그런 의미로 우리 노래 함께 부를까?
하늘 맞닿은 저곳이 널 불러
그 누구도 모르는 곳
바다에 나가면 바람이 도와주지
넌 갈 거야 마침내 머나먼 대륙을 향해 넌 떠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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