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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walker May 17. 2022

능소화

곧 올 여름을 기다리며

여름-하면 당장 떠오르는 색들이 있다. 나에겐 보통 초록과 파랑이다. 단 두 가지 색에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을 모두 내어주다 보면, 이 계절은 해에 따라 다르게 찾아온다. 천천히 앞선 계절을 덮어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손님마냥 성큼 들이닥치는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파랑이나 초록을 떠올릴 땐 생각지 않던 색이 불쑥 나타난다. 예상치 못 한 곳에서 주황빛이 눈에 걸리면, 그건 능소화다.


누구와 걷고 있던지 간에 능소화가 보이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혹은 엄마에게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조금은 뽐내는 듯 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이제껏 수많은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누구도 ‘맞아, 나도 들었어’라거나 ‘그러게’하는 반응을 보인 적 없기 때문이다.


‘능소화 꽃가루는 눈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돼. 돌기가 나 있어서 눈에 들어가면, 그래서 막 비비면, 눈이 먼대.’


능소화 바로 아랠 지나가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웃겨서 나는 한 두마디 흘리듯 덧붙인다. ‘옛날에는 그랬대, 옛날에는.’ 눈을 멀게 하는 꽃 아래를 지나며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꽃을 바라본다. 덩굴은 파랗고, 꽃은 붉다. 자꾸 바라보다 보면, 현실적이지 않은 색으로 느껴진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를 하며 나는 그걸 엄마에게 들었다고 굳게 믿는다. 인터넷에 한 두번만 검색해보면 바로 진위가 밝혀질 이야기지만, 오래도록 한번도 검색해 볼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


엄마는 꽃을 좋아한다. 혹은 좋아했다. 내가 어리던 시절만 하더라도 엄마가 어디선가 종종 꽃을 들고 오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것조차 흐릿하다. 하지만 다 큰 후에도 ‘엄마는 꽃을 좋아한다’라는 생각이 굳건하니, 사실이었다고 믿는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더 이상 꽃을 사들고 오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며 밖으로 나가는 횟수도 많이 줄었다. 자연스레 꽃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점점 줄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설화 같은 이야기들일지라도 나는 그런 얘길 듣는 걸 좋아했다. 이제는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걸 엄마가 말해줬던 게 맞는지 아닌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내게 그런 얘길 해줄 사람은 엄마 밖엔 없다는 생각에 그렇게 믿기로 고집한다.


꽃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여인은 오지 않는 지아비를 그리다 겨우내 꽃이 되고, 또 어느 노파는 가장 사랑하던 손녀를 보러 고개를 오르다 명을 다 하고 그 자리에서 등이 굽은 꽃이 난다. 가끔 어떤 꽃은 바다를 여러 번 건너 먼 이야기를 전해다준다. 그래서 나는 온 세상이 거친 가운데 여리기만 하던 시인이 그와 닮은 시 여러 편을 남기고 마침내 꽃의 가시에 찔려 죽었음을 안다. 대개 꽃에 얽힌 이야기는 슬프다. 안타까운 삶을 살아오거나 그 마무리가 영 비극적인 이들이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어떤 이의 생을 위로하고 기억해주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꽃에 그 이야기를 깃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되는 순간은 아름다울 수 있게 말이다. 시간은 사라지지만, 꽃은 흙이 있는 한 언제든 돌아온다. 그리고 그 꽃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영원히 꽃의 생은 이어진다. 계절은 오고 그 계절의 꽃은 피지만, 사실 그 이야기는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다. 수만번의 계절을 따라 흙 속에, 혹은 빗물 속에서 조용히 흘러갈 뿐이다. 어쩌면 꽃의 포자는 바로 그런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그 꽃에 얽힌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치 않아진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며.


엄마는 능소화 꽃의 이야길 누구에게서 들었을까? 엄마의 엄마, 혹은 엄마의 엄마의 엄마, 혹은 그 훨씬 위.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고 내 피 안에서 점점 옅어지는 누군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득해진다.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한 말들이 수세기를 흘러 여기, 내 입까지 왔다는 사실에 아찔하다. 그동안 강이 생겨났다가 사라졌고 산이 솟았다가 닳아 없어지고 한 송이 꽃이 온 나라에 자식을 퍼뜨렸다. 나는 주황빛의 꽃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 꽃가루가 날려 눈에 들어가고, 따가움에 살갗을 마구 비비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이 정말, 있었을까? 그 꽃을 피워낸 흙이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때, 눈이 멀어버린 사람보다 눈을 멀게 한 꽃을 주목하는 이야기는 신화다. 같은 꽃을 바라보고 그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신화다. 어쩌면 내가 지금 엄마에게 가서 그 얘길 하면, 자기는 그런 얘길 처음 들어본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기원이 엄마의 입이 맞는지 아닌지, 그 자체가 내게는 신화 같은 이야기다.


대개의 신화는 무언가에 대한 경보의 노래다. 경보음도 노래가 될 수 있다면. 능소화의 신화는 무엇을 경계하는지 생각해본다. 무심코 한 행동이 가져오는 파국? 아름다움 뒤에 따라오는 무서운 이면? 나는 그저, 내가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은 게 맞는지, 또는 엄마가 정말 내가 어리던 시절에는 손수 꽃집에 가 꽃을 사오던 사람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장 보는 길에 꽃을 한 다발 안아 오고, 일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낱 설화 따위를 기억하고, 그걸 어린 딸에게 이야기해주는 걸 즐기던 낭만이 엄마에게 아직 남아있을까? 흐릿해지는 기억들이, 혹은 내가 저장의 순위에서 뒷전으로 밀어두던 기억이 경보음처럼 다가온다.


어떤 신화는 기록되고 어떤 신화는 공기 중에 흘러내리다가 땅으로 스며든다. 또 어떤 이야기는 마음을 기둥 삼아 덩굴을 감아 올린다. 한 두 개의 가지가 잘려 나가더라도 기둥 자체가 날아가지 않는 한 덩굴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 이야길 믿든 믿지 않든 여름은 날아갈 일이 없고, 그러면 내 안의 여름을 휘감은 능소화는 꼭 꽃을 피운다. 수많은 꽃이 여름 동안 피고 지지만 나는 무조건 능소화를 보아야 여름인 줄을 안다. 눈이 머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번은 해주어야만 여름이 온 걸 인정한다. 여름이 오고 내가 그 여름을 나는 한, 앞으로 몇 번의 여름이 오든 내 이야기 속에서 능소화에 눈이 먼 누군가는 계속 돌아올 것이다. 눈은 멀었을지라도 제 갈 길을 잘 아는 사람처럼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잊더라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엄마와 나눈 한 가지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한 번 발화된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신화다.  


그저 꽃을 바라 보다가 눈이 멀어버렸다는 지독하게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이야기는 내 입에서, 내 맘에서 흘러나오면서 정서를 전환시킨다. 두려움의 정서는 날아가고 나는 그 이야기를 뱉어낸 후 어쩐지 애틋해진 끝맛을 느낀다. 어떤 신화는 오랜 시간을 건너 겨우 내 입 안에 정착한다. 이 신화의 세상이 내 입 안이라니, 오랜 시간을 뛰어넘은 설화 속 인물에게는 유감이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명맥을 이을 순 있다는 점에서 상부상조가 아니겠냐고 되뇌인다. 나는 말을 많이 하고, 여름에는 꼭 능소화가 필 것이고, 내게 여름을 넘겨 버리는 재주는 없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공기는 습하고 하늘은 아프도록 쨍하고 발가락 사이가 자주 붙었다 떨어지지만 그 사이에서 능소화를 본 순간 나는 홀로 된 신화를 떠올린다. 덩굴을 감아올리는 그 식물처럼 나는 이 이야기를 놓아줄 마음이 없다. 어디서든 감아올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영원히 이 이야기를 말할 것이다. 이젠 멀리 떨어져버린 것들과 나를 이어주는 이상한 이야기가 내게는 있다. 적어도 여름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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