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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un 12. 2023

밥을 짓다

전업주부의 일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식사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저는 아이가 생기면서 밥을 짓는 행위의 고귀함을 몸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거나 먹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죠. 어디서부터 왔는지, 첨가물은 없는지, 항생제를 넣었는지, 조금씩 원재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왜 일일이 따져 먹지 않았을까요. 제 입으로, 우리 가족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얼마 전 전기밥솥의 내 솥과 고무 패킹을 새것으로 갈아 끼웠습니다. 이유 없이 밥맛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쌀도 몇 번 바꿔봤지만, 단순히 재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새로 나온 디자인도 탐나는 마당에 밥솥을 바꿔버릴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찌 보면 이사라는 타이밍도 기회였고요. 하지만 밥솥은 나 멀쩡하다며 열심히 추를 흔들어댔습니다. 찾아보니 내 솥이 오래되면 코팅이 벗겨져 밥맛이 떨어진다더군요. 고무 패킹은 시간이 쌓일수록 압력이 느슨해지고요.     


주문한 새 내 솥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습니다. 그 안에서 쌀알들이 미끄러지듯 춤을 추며 혼을 다할 것만 같습니다. 백미모드, 오늘은 햅쌀만 넣어 밥을 했습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밥맛이 좋아졌을 뿐인데 목돈이라도 생긴 듯 신이 났습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아들의 최애 메뉴인 돈가스도 튀깁니다. 흰쌀밥에 김치도 빼놓을 수 없지요. 잘 익은 깍두기도 꺼내 봅니다. 자, 이제 김이 모락모락 구순 내가 나는 밥을 휘젓습니다. 밥은 늘 맨 마지막에 풉니다. 최대한 뜨끈한 밥을 먹이고 싶기 때문이죠. 밥 먹자는 소리에 부자가 참새처럼 모여듭니다. 어미 새의 마음이 지금 제 마음과 같을까요.    

 

사적인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먹이는 이 시간이 어찌 보면 가장 원초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먹고 자고 싸는 게 인간의 기본적 삶이니까요. 잠버릇 때문이라도 따로 자는 데 타협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충분히 개인적인 영역이고요. 하지만 먹는 건 굳이 혼자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족이라면 말이죠. 가족은 한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이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이 밥상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고가 만나 비로소 탄생한 합작품입니다. 그 책임과 의무를 알기에 허기는 물론 온기까지 채울 수 있는 식탁이면 좋겠습니다. 바깥일을 부담 없이 나누고 집안일을 미련 없이 나누는 소통의 장이라면 근사할 테고요.      


오늘도 무사히 함께 모여 밥 한 끼 나눌 수 있음에 문득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또 금세 잊어버릴 거라는 것도 압니다. 휴대폰만 내려다보는 남편과 아들이 얄미워 밥상을 치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새 한 뼘 더 자라난 아들의 몸집에서 저 역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밥심으로 마음의 근육까지 단단해졌나 봅니다. 아들 밥숟가락에 잘게 썬 돈가스 한 점을 후후 불어 올려줍니다. 기꺼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주는 애교쟁이라지요.    

 

엄마의 집밥엔 생선이 단골손님이었습니다. 생선을 유독 좋아하는 아빠 때문이었죠. 가시를 골라내고 여린 살을 발라주느라 엄마 몫은 초라하기 일쑤였습니다. 밥상에 혼자 남아 생선 뼈에 남은 살들을 쪽쪽 빨아먹던 엄마의 얼굴을 흉물스럽게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한 집안에 내려오는 전통처럼 아들이 남긴 음식을 뒤적이는 제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엄마에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겠죠. 결코, 흉물스러운 잔반 처리가 아니라 밥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장식하는 자랑스러운 그 얼굴이요. 할머니의 밥 솜씨를 찬양하던 엄마는 이제 할머니의 밥상을 추억하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언젠가 그럴 날이 올 테지요. 엄마 밥상 덕은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 딸내미 집밥 구경을 부지런히 시켜드려야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밥심엔 밥심이라 믿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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