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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un 20. 2023

비움과 채움

냉털(냉장고 털어먹기)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냉장고를 채우기 전에 먼저 알뜰히 비워내는 신성한 작업을 일컫습니다. 냉털 요리가 생겨난 데는 개개인의 여의치 않은 주머니 사정에서부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를 위한 전 지구적 동기까지 광범위한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요즘은 1인 가구가 늘고 집밥 먹을 일도 적어 냉장고는 잔고가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 집 냉장고도 그렇습니다. 냉동식품을 선호하지 않기도 하고, 입이 짧다 보니 어느 새부턴가 식자재를 쌓아두지 않습니다. 일주일치 장을 봐두면 그게 전부입니다. 어찌 보면 장보기가 더욱 중요해진 셈이죠. 그래도 장을 보기 전에 다시 한번 샅샅이 둘러봅니다. 남겨진 재료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가늠하고, 덧붙여야 할 것들로 장보기 품목을 결정합니다. 결국, 냉털로 한 주의 집밥 목록이 산출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초창기에는 주로 대형마트를 다녔습니다. 장보기보다는 마트 보기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난감 구경할 아이는 없는데 비슷한 모양새로 신이 나 카트를 잡아끕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장바구니로 막을 것을 카트로 막으려 했으니 말이죠. 기어코 이유를 찾아내 테트리스라도 하듯 카트의 빈자리를 채워놓습니다. 우리 집 창고와 냉장고만 까닭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날이었죠. 결국, 나날이 늘어가는 건 뱃살과 카드값이었습니다. 아들의 충치도 좀 더한 것 같고요. 무엇보다 썩어 문드러진 음식을 버려대는 건 썩어빠지게 돈 벌어오는 남편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남몰래 처리한다고 해도 양심이란 녀석이 불현듯 심장을 콕콕 짚어댔습니다. 이제 대형마트는 장보기가 아닌 마트 보기만 할 때 갑니다.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은 거뜬히 때울 수 있었으니 낭비만 있는 곳은 아니겠지요, 아마도.     


오늘도 장바구니를 챙겨 동네 친환경 마트로 향합니다. 국내산 먹거리들로 가득한 이곳은 공간만큼이나 식자재도 소박합니다. 덕분에 이번 주 필요한 것들만 간단히, 두 손은 가벼워도 선택엔 무게를 둡니다. 담아야 할 게 명확하니 길을 잃지 않습니다. 비용도 시간도 예상 범위를 널뛰지 않고요. 전보다 장보기가 한결 상쾌해졌습니다. 숨통 트인 냉장고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지 식자재가 더욱 싱싱해진 느낌입니다. 시야가 트이니 냉장고 앞에서 우물쭈물할 이유가 없습니다. 밥상은 더불어 신속, 건강해졌고요.      

냉장고를 비우면서 비워내는 행위 자체에 희열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시작한 일이 결국 창고로, 방으로, 거실로 확대되는 진풍경을 만들었지요. 중고 앱과 지인 풀을 활용해 쉼 없이 들어내다 보니 저절로 미니멀 라이프를 이룩했습니다. 통장 잔고도, 매너 온도도 상승했고요. 마치 알뜰한 주부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졌습니다. 하지만 구멍 난 곳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 메꾸고 싶다는 욕망이 또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마침 필요한 물건이 하필 그때 보내버린 것이었다는 뼈 아픈 자각을 감당해야 하기도 했고요.     

 

“무소유란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처럼 불필요한 것을 비워내다 보면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뒤늦게 찾아오는 공허함도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될 테고요. 물건도, 생각도 점점 단순해지다 보면 그리는 장면이 좀 더 명확해질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예기치 못한 채움을 만나기도 하고요.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는 여전히 그 집 한가운데 있습니다. 자식들은 출가했고 남편은 퇴직 후 귀촌을 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느라, 새로운 정원을 가꾸느라 모두가 바쁩니다. 그저 자식을 키워내는 게, 남편을 내조하는 게 인생의 전부였던 그녀이기 때문일까요. 엄마만 새로운 채움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속절없이 비움을 당해내고만 있는 엄마가 안타까워 뭐든지 채워드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서야 문득 알았습니다. 그것은 엄마, 자신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내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틈틈이 심사숙고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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