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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un 26. 2023

정리정돈과 남겨진 것

음식에만 유통기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물건에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영화 속 명대사도 있었지요. 음식은 좀 그렇고 물건의 유통기한도 한 10년쯤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문득. 물론 유통기한이 지날 때까지 쓰게 되는 집안 물건은 거의 없습니다. 기한은 지났는데 쓰지 않았거나 덜 쓴 것들을 발견하는 일들이 있을 뿐이지요. 애초에 정해진 유통기한이 없는 물건들도 여럿이고요.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구석 곳곳에 은둔하다가 먼지에 둘러싸여 처참한 몰골로 발각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살던 집을 옮기게 될 때 잊고 살던 물건들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개중에는 반가운 추억을 안겨주는 것도, 씁쓸한 기억을 되새기는 것도 있지요. 함께하는 물건도 결국 저의 삶을 대변하고 있나 봅니다. 신축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팬트리가 생겼습니다. 물건들에도 안정된 집이 생긴 셈이었죠. 이산가족 상봉하듯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물건들이 제 짝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가짓수도 개수도 예상 범위를 넘나드니 모임을 개최한 주최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이제 헤어지지 말자 다짐하며 각자 분양받은 집으로 들어갑니다. 당분간은 마음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비용도, 시간도 꽤 소비되긴 했지만요, 쿨럭.      


언젠가 한 방송을 접하고 정리정돈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정리정돈 전문가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실력이 가히 놀라웠지요. 그녀의 손이 닿은 집은 단 하루 만에 리모델링이라도 한 듯 완전히 탈바꿈되었습니다. 흩어져있던 물건들을 모으고 재배치하며 약간의 센스를 더했을 뿐인데 말이죠. 집주인에 빙의되기라도 한 듯 함께 감동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시청을 했더랍니다. 슬쩍슬쩍 우리 집을 곁눈질하게 되기도 했고요. 제가 느낀 핵심은 일단 한눈에 보이도록 하는 게 특징인 것 같았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두되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하는 것이죠.     


사실 어린아이가 사는 집에서 정리정돈을 논하는 건 사치입니다. 이미 첫 관문인 거실부터 아이의 놀이터로 재배치되니까요. 저도 한 2~3년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육아국민템이라 불리는 장난감들을 모조리 꺼내두어야 그나마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큰 탈 없이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안방은 또 어떻고요. 언제 잠들지 예측할 수 없는 아이를 위해 이부자리는 정리할 새가 없습니다. 분유만 찾던 아이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널브러진 부엌 풍경도 한몫했고요. 물건의 스케일이 작아질 뿐 이후에도 버라이어티 한 변화가 있지는 않습니다. 가끔 시키지도 않은 정리를 말끔히 하곤 뿌듯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변화라면 경이로운 변화이고요.     


이사를 하면서 거실을 차지하던 아이의 짐들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몇 날 며칠 벼르고만 있던 일들이 이사라는 큰 물결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대부분 아이의 허락을 받고 처분해야 했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찾지 않았던 물건은 아이 기억에서 역시 사라진 듯 보였습니다. 어쩌다 마주친 동생 손에 쥐어진 장난감이 아이의 추억을 소환할 때도 있긴 했지만요. 쿨하게 보내준 물건처럼 추억 또한 쿨하게 넘겨버리는 모습이 참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잦은 이사에도 버릴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하다 결국 또 싸매 오는 저와는 참 달랐으니까요. 세월은 미련까지 잡아두는 속성이 있나 봅니다, 쿨럭.     

 

물건에도 혼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손에서 오래도록 자리한 물건이라면 더 그렇고요. 그 물건은 그 사람과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또 공감했을까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물건의 주인이 떠난 뒤엔 그 기운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손 떼와 체취는 물론 그가 머물다 간 모든 시간이 녹아있는 느낌이랄까요. 함부로 물건을 정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할머니의 옷 몇 가지를 챙겨 왔습니다.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서”라고 덤덤히 얘기하던 엄마였지요. 하지만 엄마가 할머니 옷을 입은 적보다 할머니 옷이 엄마 옷장을 채운 때가 더 많습니다. 몇 해가 지나도 엄마 옷 사이에 자연스레 자리하고 있는 할머니 옷이 꼭 할머니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부여잡지 않아도 언제나 네 곁에서 함께하고 있다고 엄마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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