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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화 Feb 24. 2020

계속 글을 쓰며 살 수 있을까?


넌 연애도 안 하면서, 무슨 연애소설을 쓴다는 거냐?



연애를 하지 않은 지 5년 정도가 되어간다. 5년 중에는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누구도 만나지 않은 시간도 있었고, 결국은 실패할 관계에 매달리느라 할애한 시간도 있었고, 좀 구질구질할 정도의 짝사랑을 한 시간도 있었고, 누구든 만나보려 적극적으로 나돌아 다닌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슬프게도 그냥 지나간 남자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몇 명은 지나가고 있는 중이며,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다면 남자들은 계속해서 나를 지나갈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근황 얘기의 카테고리 속에 <연애> 얘기를 꼭 빼놓지 않는데, 나는 그들이 약간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요즘 연락하는 사람은 없어?"란 질문을 하면 참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해 줄 얘기가 없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소설을 잘 쓰고 있고, 또 쉬지 않고 쓴다. 



어차피 로맨스는 판타지다.



로맨스의 성공요소는 작가가 얼마나 낭만적인 연애 경험이 있느냐가 아니라, 단순히 남자 주인공의 매력과 스토리의 흡입력이 좌우한다. 그래서 나는 소재를 떠올린 뒤 가장 먼저 남자 주인공을 만들고, 그 남자 주인공의 매력요소에 몹시 큰 공을 들인다. 독자들이 선호하는 남자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남자로 설정한다. 돈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고, 키가 크고, 또 어깨가 엄청나게 넓은 데다가 몸이 좋으면 된다. "그런데, 현실에 그런 남자는 없잖아!"라고 반문하면 곤란하다. 독자들은 현실에 그런 남자가 없기 때문에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이다. 나를 우매하고 속물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다면, 정확하게 보긴 했지만,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현실에 있는 아무 남자나 데려다가 남자 주인공으로 섭외해서 드라마를 방영한다고 생각해보자. 옆 집에 사는 남자라든가, 아랫집이든, 윗집이든. 길가다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남자. 그 남자가 10시에 방영되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은 그 드라마를 보겠는가? 일단 나는 응, 안 본다.



돈 많은 남자 주인공은 아무래도 너무 식상하지 않냐고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에는 아예 돈이 없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남자판 신데렐라 소설을 썼다. 대신 여자 주인공이 엄청나게 부자였다. 나는 그 작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가난하다. 물론, 내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경제적 상황을 뒤바꾼다면, 이만큼 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 주인공이 돈이 아주 많거나, 그럭저럭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설정값을 매긴다. 그게 나도, 독자도, 출판사도 편하다.



이처럼 내 작품 활동에 개인적 연애의 진행 여부는 털 끝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행여 내가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게 내 연애소설의 판매실적을 향상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한 두 문장 정도는 연애 감정에 대해서 조금 더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게 당장 돈으로 연결되지는 않으니까. 아. 글을 쓴다는 사람이 너무 돈, 돈 거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눈살을 찌푸릴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쓰고 싶은 글만 쓴다면 가난해지기 마련이고, 가난해지면 결국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한다. 어쩔 수가 없다. 하여 나는 너무 가난해져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 한 평범한 노동자보다는,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서 돈돈 거리는 구질구질한 문장 노동자가 되는 쪽을 택했다.



얼마 전에는 친구들과 모여 놀다가, 사주를 보러 갔다. 사실 처음의 의도는 언제 남자 친구가 생길지나 물어보자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친구들이 제 생년월일시를 줄줄 부르고 있었다. 사주를 봐주는 선생님이 친구더러 하는 일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치라고 했고, 또 다른 친구에게도 회사를 그만둔다면 공인중개사 시험을 치라고 했다. 그러다 내 차례가 왔는데 나는 덜컥 겁을 먹어서, 사주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혹시나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시험 준비나 하라는 소릴 들으면, 내가 서른세 살쯤이 되었을 때, 다른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할까 봐 무서웠다.



친구들은 지나간 연인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새로운 사랑은 언제쯤 나타날 것인지, 결혼은 언제쯤 하게 될지, 바람은 나지 않을지, 등등 더 많은 질문들을 했었다.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공부를 하란 소리 말고는, 썩 듣기 좋은 얘기들만 해줬던 것 같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선생님께 "안녕히 계세요."하고 인사하고 나와, 아무래도 저 선생님은 사짜인 것 같다고 단정 지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근거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친구들은 당장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선생님이 사짜라고 굳게 믿는 쪽이 아무렴 좋을 테니까. 그래야만 우리가 선생님의 충고를 무시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앞으로의 내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좀 했다. 나는 자주 내 능력에 대해 의심한다. 어떤 날에는 자려고 막 누운 자리에서 의심을 시작하는 바람에 해가 뜰 때까지 잠을 못 잔다. 그 시간에 한 줄이라도 글을 썼다면 백 원이라도 벌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 바람에 엉망이 된 컨디션으로 다음 날 하루를 다 망쳐버린다. 그래서 요즘에는 누운 자리에서 걱정이 떠오르면, 서둘러서 무언가를 먹는 상상을 한다. 근래에는 상상 속에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많이 먹는다. 아, 햄버거도!



서른이 또 훌쩍 가까워졌다. 나는 어떤 서른이 되어 있을지 항상 기대된다고만 얘기했었는데, 막상 스물아홉이 되어 서른을 기다리자니 조바심이 난다. 올해는 정말 열심히 소설을 쓰려고 한다. 계속 글을 쓰면서 살고 싶어서다. 쓰는 일을 일상으로 두고 늙고 싶다. 돋보기를 끼고 매일매일 책을 들여다보고, 무언가를 끼적거리는 할머니가 내 장래희망이다. 돈 때문에 이 멋진 장래희망을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나는 아무래도 너무 슬플 것 같다. 너무너무 슬퍼져서, 그런 미래는 상상조차도 하기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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