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요, 초능력 가족이에요."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서 '복이나'가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는 대사다. 이 드라마는 눈을 감으면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초능력을 가진 복귀주를 중심으로 서사가 시작된다. 복귀주의 엄마인 복만흠 여사는 꿈에서 미래를 볼 수 있고, 복귀주의 누나인 복동희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복귀주의 아내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면서 복귀주는 우울증에 시달린다. 매일 술에 절어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복귀주는 자신의 딸인 복이나에게도 외면당하며 암울한 시기를 보낸다. 결국 더 이상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없게 된 복귀주는 초능력을 상실한다. 복귀주의 우울증은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복만흠 여사는 불면증에 걸려 예지몽을 꿀 수 없게 되고, 복동희는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을 만큼 뚱뚱한 비만이 된다. 초능력을 잃고 내리막길로 몰락하는 복귀주 가족들 앞에 도다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도다해는 돈을 목적으로 복귀주에게 접근한 사기꾼이지만, 복귀주에게는 사기가 아닌 사랑에 빠진다. 초능력자와 사기꾼, 이 뜬금없는 조합이 서로를 구하는 사이가 되면서 독특한 치유의 서사가 완성되고 그 속에선 신비한 문학적 향기가 느껴진다.
'도다해와 있었던 시간으로만 돌아간다. 도다해 한테만 보인다.' 도다해를 만나고 초능력이 다시 생긴 복귀주, 매미가 힘차게 울어대는 지난 여름낮으로 돌아간다. 윤슬이 비치는 분수대를 지나 도다해를 향해 걷는다.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본 도다해의 눈빛에는 반가움이, 그런 도다해를 발견한 복귀주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서려있다. 둘은 한참을 그저 말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본다. 조심스러운 복귀주의 마음을 배려하듯 도다해가 먼저 말을 건넨다. "왔어요?" 그 순간 잔잔한 피아노 선율 위에 다정한 목소리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말했죠, 난 아니라고. 뒤돌아 보지 말아요.
안 돼요, 사랑만으론 우리의 미래가.
<너와 걷는 계절> 중
소수빈의 <너와 걷는 계절>은 새로운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복귀주의 마음을 잘 담아냈다.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라한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럼에도 사랑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마음이 가사에 그대로 담겨있다. 소수빈은 이 가사를 시청자의 몰입이 깨지지 않도록 숨소리 마저 섬세하게 다듬어 부른다. 덕분에 과거의 복귀주와 현재의 도다해가 만나는 순간, 소수빈의 <너와 걷는 계절>이 흘러나오면 반짝이는 마법가루가 흩날리는 것만 같다. 마치, 나도 행복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음악의 공간을 악기소리로 꽉 채우지 않고 적막으로 일부를 채웠다는 점도 흥미롭다. 피아노와 목소리로 단조롭게 구성된 음악 사이에 적막이 흐르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적막 속에서 은은히 들리는 노랫말이 복귀주와 도다해의 유치한 SF 히어로 서사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감미로운 미성, 안정적인 호흡, 부드러운 숨소리, 투명한 가성과 탄탄한 진성의 하모니까지. 나는 이 정도로 섬세한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소수빈은 이 음악을 위해 몇 번이나 녹음을 했을까? 단 한 번이다. 우리가 듣고 있는 <너와 걷는 계절>은 소수빈이 녹음실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불렀던 녹음본이라고 한다. 보통은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수백, 수천번의 녹음을 거친다. 음악의 세부 요소를 편집하기 위해 마스터링 과정을 필수다. 그러나, <너와 걷는 계절>은 소수빈의 목소리가 가진 감성을 살리기 위해 마스터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드라마의 음악 감독이자 이 음악의 작곡가인 정재형은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순정마초>라는 음악으로 처음 알려졌다. 정재형은 <너와 걷는 계절>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마스터링을 시도했으나 소수빈이 처음으로 불렀던 원곡의 느낌을 살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마스터링을 하지 않았으니 볼륨이 작을 수 있다며 듣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도대체, 작곡가가 음악의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걸 설명하기 위해 여러 번을 쓰고 여러 번을 지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종종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복귀주 가족과 닮은 구석이 있다. 저는 사실 초능력이 있어요, 같은 어설픈 농담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복귀주나 우리 가족이나 많이 아픈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살아있는 지옥, 긴 간병에는 장사 없다."라는 기사를 우연히 봤다.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아내를 죽이려다 경찰에 붙잡힌 남편의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있었다. 기사의 댓글 중 '아픈 가족을 오랫동안 간호하면 생기는 병이 간병'이라는 말이 많은 공감을 받고 있었다. 나도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에는 부모님이 간병을 해주셨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는 일부터 시작해, 잠깐 공원에서 산책을 할 때도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루, 이틀, 한 달 그리고 일 년이 지나니 우리 가족은 웃음을 잃었다. 나는 엄마가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일도 짜증이 났고, 아빠가 방문을 세게 닫는 것도 너무 싫었다. 종종 자식인 나는 이렇게 아픈데 부모인 당신들은 왜 그렇게 멀쩡한지 억울하기도 했다. 당시 부모님은 그런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내 눈치를 보았고 나를 최대한 피해 다녔다. 통증에 잡아먹힌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경험한 날들이다.
엄마가 술에 취한 날이 있었다. 그 마저도 엄마는 나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창고에서 술을 마셨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엄마가 걱정이 되어, 집을 돌아보다 창고에 쓰러진 엄마를 발견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할 정도로 많이 마신 엄마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 상황에도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내 이름은 아주 정확하게 발음했다. 응급실에서 엄마가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집에서 마음을 굳게 다졌다. 다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정말로 다시 살아보겠다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킬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도, 거기서 구원이 됐던 건 내가 언젠가는 저런 인간을 소설로 한번 써야지 하는, (...) 불행의 제일 밑바닥에서도 그것이 불행감을 조금 덜어주고 그래서 아주 뼛속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박완서의 말>
그럼에도, 종종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오는 날이 있다. 통증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은 덤이다. 나는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박완서의 말을 읽었다. 박완서 선생님이 견딜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복수심을 키운 것처럼, 나는 견딜 수 없는 통증과 불안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았다. 지금은 내가 아파서 할 수 없이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놀랄 만큼 멋진 글을 써주겠다고. 당장 나를 죽일 것 같은 불행이 훗날 나를 살릴 수 있는 글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바닥만큼 불행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행한 순간도 나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이제야 회복기에 들어섰다. 나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졌고, 부모님은 새로운 삶을 위해 음식 장사를 시작하셨다. 간병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스스로의 삶을 일구기 시작한 부모님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10평 남짓되는 작은 가게지만 우리 가족의 희망을 심은 곳으로 남다른 애정이 생긴다. 온라인 마케팅, 배달 플랫폼 등 부모님이 익숙하지 않은 일을 내가 도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침대에 누워서 모든 드라마를 섭렵하던 시절 <너와 걷는 계절>을 들으면 항상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복귀주가 부러웠다. 불행한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내가 매일 꿈꾸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너와 걷는 계절>을 아무리 들어도 복귀주가 부럽지 않다. 나는 이제 과거를 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계절을 기다린다. 더 이상 초능력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우리 가족이야 말로 진짜 히어로 가족이 아닐까, 하는 귀여운 생각을 한다. 오늘은 <너와 걷는 계절>의 마지막 가사가 사뭇 따뜻하게 들린다.
다시 살아지겠죠, 창 밖의 봄은 스치듯 지나고 돌아오겠죠.
멀리 떠나보아요, 땀이 흐르듯 여름은 곧 가고 지운 듯 마르겠죠.
<너와 걷는 계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