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km, 61시간 55분. 작년 6월 한 달간 산책 기록이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거리가 자그마치 258km다. 이 정도면 산책 면허증이라도 하나 만들어주고 싶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계절이 변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봄에는 푸른 새싹이 움트는 소리, 여름에는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 가을에는 바닥의 낙엽이 밟히는 소리, 겨울에는 함박눈이 흩날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계절을 담은 소리는 영원하지 않았고 언제나 손에 닿을 듯하면 금세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 작가 김신지의 <제철 행복>을 읽었다. 김신지는 그 계절을 즐기면 더 좋은 제철 음식이 있듯이, 그 계절에 즐기면 더 좋은 제철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우산 없이 봄비를 맞으며 즐기는 산책, 여름밤 젊음과 생기가 넘치는 축제, 가을의 멋을 한껏 뽐낼 수 있는 더블코트, 겨울 포장마차에서 먹는 붕어빵까지. 지금을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하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제철 음악도 있다고 슬쩍 우기고 싶다. 봄날의 산뜻함, 여름의 청량함, 가을의 차분함, 겨울의 고요함. 제철 음악은 계절의 정취를 더욱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당신도 제철 음악을 알게 되면 어느새 동네 공원을 춤추듯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봄에 듣는 제철 음악은 새소년의 난춘이다. 난춘은 어지러울'난(亂)' 과 봄'춘(春)'의 낯선 조합으로, 제목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봄은 만물이 다시 시작하는 희망이 가득한 계절이지만, 누군가는 겨울 내 추위를 기진맥진 버텨내느라 그 희망을 도리어 버겁게 느낀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희망을 보며 절망에 빠지는 그 위태로운 마음을 직접 느껴보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곡이다. 이 음악은 드럼의 플로어 탐을 강하게 2번 내리치면서 시작되는 도입부가 예술이다. 플로어 탐이란 스틱으로 내리치는 드럼 중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드럼으로, 웅장한 소리를 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난춘의 둥퉁, 도입부 드럼은 봄의 새싹이 자기를 감싸고 있는 껍질에 원투 펀치를 날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새소년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음악을 스타팅 피스톨로 사용했다. 운동화 끈을 묶고 난춘을 들으면 '탕'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달리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근질거렸다. 봄비가 내리는 궂은날이든, 봄날의 햇살이 따뜻한 날이든, 나는 모든 봄날의 산책을 난춘으로 시작했다.
처음부터 강하게 표현하는 드럼과 달리 보컬 황소윤은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절제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꾸역꾸역 참는 듯이 가삿말을 담담하게 읊조린다. 그러다, 마지막 문장을 노래할 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데, 그 순간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라고 울부짖는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전율이 돋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서 고요히 죽어갈 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황소윤은 난춘을 만들면서 이런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난춘은 그런 황소윤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 같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봄날의 나조차도 매일 걷게 만들었으니.
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 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이리 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새 소년_난춘
무더운 여름날 들어야 하는 음악은 백예린의 Square다. 이 음악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청량한 바다를 소환한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봐야 백예린 손바닥 안이라는 것이다. 특히 윤슬이 데구루루 굴러가듯 맑은 톤의 기타 소리는 더위로 불쾌해진 내 기분을 순식간에 상쾌하게 만든다. 청량함을 대표하는 뮤지션 백예린은 독보적인 음색으로 목소리가 지문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Square는 백예린의 음악 중에서도 다양한 음색을 듣는 재미가 있는 곡이다. 특유의 잔떨림이 있는 저음부는 지금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손을 잡을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 느껴지고, 일정한 톤으로 힘 있게 뻗어가는 고음부는 망설이는 사람의 손을 예고도 없이 낚아채버리는 확고함이 드러난다.
지독한 폭염의 여름날, 산책을 하면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긴 했어도 냉수샤워를 하면서 백예린의 Square를 들으면 더운 여름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냉장고에 깍둑썰기로 넣어둔 시원한 수박을 베어 먹을 생각에 약간은 설레기도 했다. 2017년 Square 라이브 영상에서 백예린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이 노래와 무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보인다. 백예린이 자유롭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백예린의 Square가 없었다면 작년 여름의 나는 어땠을까? 무더위에 만사가 귀찮아져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백예린의 Square 덕분에 나는 그 모든 더위에도 이 미친 여름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If you’re not in the right mood to sleep now then
네가 당장 잠들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면
Come on, let’s drink and have very unmanageable day
나와서 나랑 마시고, 감당하기 힘든 하루를 보내자
백예린_Square
나에게 가을이 좋은 이유를 물으면, 바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계절이라서 좋다고 말한다. 바람에 낙엽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계절. 그게 바로 가을이다. 그러니, 모든 가을은 바람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하고, 가을 제철 음악도 당연히 바람에 대한 노래로 소개하고 싶다. 기대하시라! 가을 제철 음악은 바로 흑인 R&B 남성 그룹 브라운아이드소울의 '바람인가요'다. 짝사랑을 할 때 느껴지는 불안한 마음을 흔들리는 바람에 비유한 가사 때문에,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특유의 기타 셔플 리듬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곡이다. 정직한 박자가 아니라 불량한 스윙으로 역동적인 리듬을 만드는데, 매년 가을이 찾아오면 그 특유의 리듬이 그리워서 찾아 듣게 된다.
낙엽이 흩날리는 거리를 산책하며 이 음악을 들으면 지나간 추억들이 발에 밟힌다. 일 년을 묵혀둔 더블코트를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던 순간처럼 사소한 일상들이 자꾸만 설레는 기억으로 떠오른다. 분명히 가을 풍경을 보면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수많은 가을 중 그 어떤 가을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과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떤 가을인가? 그것을 알아내고자 산책길의 풍경을 요리조리 살핀다.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못생긴 모과, 감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감을 뜯어먹는 참새, 머리가 무거운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황금빛 곡식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까지. 여름 내 더워서 보지 못하고 있던 풍경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의 풍부한 화음은 가을에 느낄 수 있는 정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마치, 잘 차려진 코스음식처럼 음악을 요리한다. 정엽이 차분한 음색으로 음악의 청욕을 돋우면 영준은 중후한 음색으로 음악의 기대감을 높인다. 그다음, 나얼이 영적인 음색으로 주요 멜로디 라인을 노래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저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가만히 듣게 된다. 완벽한 코스 음악이 끝나면 더 듣고 싶은 마음이 들어 애꿎은 다른 음악들을 나무란다. 그렇게, 가을 내내 짝사랑에 빠진 아이처럼 한결같이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대 막을 길 없죠
내 맘 곳곳 흔들고 또 사라진 대도
소리 없는 울림 그대라는 바람
온몸으로 느껴요
사랑인걸요
브라운아이드소울_바람인가요
마지막 겨울 제철 음악은 뉴진스의 Ditto 다. Ditto는 라틴어로 "나도 그래."라는 동의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뉴진스는 "너도 그래?"라는 사랑을 확인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Ditto는 겨울이라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사운드에 잘 담아냈다. 특히 음악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몽환적인 허밍은 고요한 겨울에 눈이 사뿐사뿐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Ditto는 4세대 아이돌 그룹 뉴진스가 젊은 세대를 넘어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학교, 교복, 매점, 캠코더, 폴더폰, 빵모자 등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물건들을 보면 모든 세대의 감성을 어떻게 아우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Ditto는 어른 세대에겐 그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추억하게 만들고, 젊은 세대에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시절의 낭만을 선물했다.
손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에도 매일 산책을 하며 Ditto를 들었다.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혹여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했지만 매일 신발끈을 조여매고 열심히 걸었다. 그런 내게 Ditto는 매일 질문을 했다. “나는 겨울 좋은데, 너도 그래?” 나는 좋다고 대답을 하는 대신 Ditto를 따라 불렀다. 작년 겨울엔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다. 20년 만에 폭설이라며 눈이 무섭게 내린 날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우산도 없이 나가는 바람에 살아있는 눈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잠바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눈이 무겁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Ditto를 듣고 있으면 지금 이 순간도 장난스럽게 느껴졌다. 손발이 얼어붙어 온몸이 뻗뻗해지는 겨울이기는 했지만 힘들고 고달픈 시기가 아니라 재밌고 특별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Ditto에게 생에 처음으로 겨울의 낭만을 선물 받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Stay in the middle
하지만 중간에서 어물쩡거리고 싶진 않아
Like you a little
약간 너처럼은 말이야
Don't want no riddle
수수께끼는 싫다고
말해줘 say it back
내게 대답해 줘
Oh say it ditto
너도 그렇다고 말이야
뉴진스_Ditto
24년 10월 가을밤, 가로등에 단풍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공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낮에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저녁엔 걸으면서 글을 쓰고 있다. 허리를 수술하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없게 된 점은 불편하지만, 오래 걸을 수 있는 보행인이 된 점은 마음에 든다. 걷는 동안은 계절의 정취를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모두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사랑의 시작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말이 있다.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생긴다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계절에게 홀딱 빠져버린 탓인지, 아니면 하루종일 계절에 대한 찬사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계절은 도대체 어쩌다 생겨먹은 것인지 출생의 비밀이 너무 궁금해졌다.
쾅! 45억 년 전, 지구는 어떤 행성과 크게 충돌했다. 그때, 지구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왔는데 그걸 우리는 달이라고 부르고 있다. 매일 밤, 어둠을 밝히는 달이 사실은 지구였다니 놀랍다 못해 감탄스럽다. 신비로운 달이 친구처럼 편안했던 이유가 다 있었구나. 더불어, 당시의 충격으로 지구의 중심이 삐둘어지면서 계절이 생기기 시작했다. 북반구가 태양열을 많이 받는 여름이 되면, 남반구는 태양열을 적게 받는 겨울이 됐다. 덕분에 우리는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고 제철 음악을 들으며 매일을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새롭게 살아간다. 지구와 행성의 충돌이 없었다면, 지구가 회복의 시기를 버티지 못했다면, 우리는 찬란한 계절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매일 똑같은 계절이라니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난다.
어쩌면, 지구는 계절을 통해 모든 것은 고통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는 자연의 순리를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봄날의 햇살이 따뜻한 이유는 겨울 내 추위를 이겨냈기 때문이고, 가을의 바람이 선선한 이유는 여름 내 더위를 버텨냈기 때문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 지금 이 순간도 자연의 순리대로 결국은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고통의 터널 속에 있더라도 조급해하지 말자. 그저, 이번 터널은 평소보다 조금 아주 조금 길구나 생각하자. 그리고, 제철 음악을 들으며 신명나게 걸어보자. 얼쑤!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에도 언젠간 빛이 스며들 것이다. 터널 뒤에 기다리고 있을 세상은, 여름에 먹었던 깍둑썰기 수박보다 더 달콤할 것이다. 아! 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맛을 상상하다 보니 군침과 함께 오늘 하루도 꼴깍 넘어간다.
너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