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구급차가 도착하기 5분 전, 나는 최유리의 숲을 듣고 있었다. 그날은 유독 허리에 통증이 심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식탁에서 일어나다 허리를 조금 삐끗했는데, 그 통증이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최유리의 숲은 그렇게 통증이 심한 날에 자주 들었다.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사로 담아낸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 평화로운 숲 속의 주인공이 되어 통증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날은 예외였다. 최유리의 숲을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통증이 가시기는커녕 허리에서 다리로 통증이 퍼져나갔다. 결국 응급실로 실려가서 바로 CT 촬영을 했다. 진통제나 조금 맞으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약성 진통제를 2방이나 맞고도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의사는 디스크가 심하게 파열되어 지금 당장 응급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통증은 물론이고 신경까지 손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수술대 위로 올라갔다. 아, 차갑다. 수술대의 차가운 질감이 수술대의 두려움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나의 몸을 절개하고 다시 봉합할 사람들이 내 눈앞을 지나다녔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영화처럼 멋지게 숫자나 세어볼까 싶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을 세니 수술은 끝나 있었다.
수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술만 하면 통증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통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이 가슬거리는 통증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병원에선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퇴원을 권유했다. 수술이 모든 통증을 없애주는 마법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대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통증을 잠시 망각할 수 있는 진통제를 잔뜩 처방해 줬다. 한 번에 5개가 넘는 알약을 집어삼키고 나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퇴원을 하고 본가에 와서 회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매일 반복해서 듣는 숲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나는 숲에 있는 것인지 바다에 있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가라앉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 앉으려나
최유리_숲
양약의 부작용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에서 허우적대던 내게 숲은 지푸라기 같은 존재였다. 최유리의 다정한 목소리에서는 겨울 내 들꽃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단단한 뿌리처럼 확고한 삶의 의지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누구보다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신경 통증과 정신 착란 사이에서 헤맬 때 작은 희망의 빛이 되었던 것이 숲이었다. 숲을 듣는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것도 숲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잠을 청하기 위해 숲을 듣고 있었다. 물론 잠을 잘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벌써 6개월을 넘게 1시간도 내리 못 자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새벽 3시가 지났지만 잠에 들지 않았다. 눈을 아무리 세게 감아 보아도, 발바닥을 아무리 빨리 비벼 보아도, 좀처럼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내일도 힘든 하루가 되겠구나, 생각하며 몸을 뒤척이는데 잠에 든 것 같은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쾌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최유리의 숲에서 도입부가 시작되는 소리다. 그 순간, 모든 책임의 화살이 숲을 향했다. 내가 이렇게 잠에서 깬 이유, 내가 이렇게 잠을 못 자는 이유, 내가 이렇게 아픈 이유,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이유, 내가 이렇게 슬픈 이유, 내가 이렇게 불안한 이유, 내가 이렇게 우울한 이유, 내가 이렇게 화가 난 이유, 내가 이렇게 짜증 난 이유, 내가 이렇게 멍청한 이유가 다 숲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마저 물에 가라앉아 버렸다.
내 인생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했다. 대학 시절엔 음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음악을 직접 만들었고, 워홀 시절엔 음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음악에 대한 책을 썼고, 직장 시절엔 음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LP 바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나는 인생에서 음악을 빼면 0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음악에 대한 혐오는 내 삶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음악을 듣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도 사라졌다. 마치, 음악이 없는 인생은 길거리에 내용물도 없이 껍데기만 굴러다니는 깡통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면 굴러가고, 누군가 발로 차면 굴러가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굴러가는 삶.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결국 찌그러지는 삶. 그것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1초마다 정직하게 움직이는 초침을 바라보며, 시간이 너무 느리다고 애꿎은 시계만 원망할 뿐이었다.
천장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던지, 시야가 흐릿해지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정적을 깨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침침했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바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 말은 내 의지가 아니라 내 무의식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다행히, 본가인 화성에서는 30분만 차를 타고 나가면 서해바다를 볼 수 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바다는 바람이 꽤나 차가웠다. 펄럭펄럭, 코트가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런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니 정신이 제법 또렷해졌다. 문득, 학교에서 숙제도 안 하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다가 선생님에게 얻어맞고 정신을 차리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라 풋웃음이 났다. 정신이 맑아지니 바다의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에 수평선까지 펼쳐졌다. 저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자유가 타고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 자유로운 바람에 파도는 끊임없이 넘실댔다. 크게 쳤다가, 작게 쳤다가, 잠시 쉬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크게 치고 작게 치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육지로 넘어가기 위해 파도는 끝도 없이 노력했다. 파도의 꿈은 육지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가 고즈넉이 지기 시작했다. 보통 저녁이 되면 오늘은 잠을 잘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런데, 그날은 자동차 창문 밖으로 스며드는 붉은색 노을빛이 오히려 나를 노곤하게 만들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다의 비린내도 마음에 들었다. 인중을 찌푸릴 정도로 코 끝이 찌릿한 바다 냄새는 내가 숲이 아니라 바다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렸다. 얼마 만에 느끼는 삶의 기쁨인지, 그 순간 음악이 너무 듣고 싶었다.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너무 오랜만에 켜서 부팅이 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음악앱을 어렵게 찾아 실행했다. 역시나 무수한 음악이 알고리즘을 통해 무작위로 추천되었다. 위, 아래로 스크롤을 몇 번 하다가 검색 버튼을 누르고 최유리를 입력했다.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 믿었던 그 최유리 말이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불행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불안의 굴레를 끊어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트라우마를 피하지 말고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음악을 잃어버리기 전에, 내가 정말로 삶을 포기하기 전에, 내가 정말로 나를 찌그러트리기 전에, 나는 최유리가 만든 숲으로 미친 듯 다이빙을 해야 했다.
최유리의 숲을 들으니 불면의 기운이 강하게 올라왔다. 음악을 듣는 내내 새벽녘 잠에서 깰 때 느꼈던 불쾌한 기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었다면 나는 시원하게 싸대기를 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트라우마와 마주하니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뭐라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용기를 내서 최유리의 음악을 하나 더 들었다. 제목은 밤바다. 노을이 지고 저녁의 어스름이 서린 바다를 보면서 듣기 좋은 음악 같았다. 도입부는 고요한 바다에서 녹음을 한 듯 오로지 최유리의 목소리만 들렸다. 정적 속에서 포근하게 읊어주는 노래를 듣고 있으니 꼭 나한테 편지를 읽어주는 것만 같았다. 소란한 마음을 감출 수 있는 밤바다가 좋다는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그 구간을 몇 벛을 반복해서 들었다. 오늘도 그랬다. 바다는 내 마음이 얼마나 요란하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다. 그리고 다음 구간을 이어서 듣는데 바다 같은 친구들이 떠올랐다.
문득 돌아보면 그날에 네 마음이
내겐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최유리_밤바다
수술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왔다. 당시에는 마약성 진통제 부작용으로 정신이 없어서 답장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예후가 좋지 않아서 답장을 하지 못했다. 도저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을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답장을 오랜 기간 보내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내게 오는 메시지도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기 내어 답장을 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메시지를 열어보지 않아도, 계속해서 나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 그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잘 지내? 어디야? 밥 먹었어? 보고 싶다. 같은 일상적인 안부가 전부였다. 나는 최유리의 밤바다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안부를 물어준 마음들이 지금까지 나를 살게 했다는 것을. 나를 가라 앉지 않게 했던건 지푸라기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실을.
바다를 다녀오고 감각들이 살아나자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삶의 의욕이 생기니 일상 속에서 의미 있는 일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의 사진과 이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민들레에게 유난히 마음이 갔다. 민들레는 다른 꽃들과 달리 잎을 바닥에 완전히 눕혀서 자라는데, 그 모양이 참 못생겨서 처음엔 눈길도 안줬다. 코스모스, 데이지, 양귀비, 개망초 등 꽃도 잎도 모두 아름답게 자라나는 식물들은 넘쳐났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계속해서 민들레로 향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민들레는 가장 민들레 답기 때문일 것이다. 민들레는 겨울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을 올곧게 밀고 나갔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필요하면 언제든 납작 엎드려, 땅의 지열을 높이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는 방식으로 체온을 유지했다. 그 작은 민들레가 누구보다 민들레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숨이 거꾸로 역류하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감당하기 힘든 순간을 극복하는 방법을 민들레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힘들수록 자신을 더욱 분명히 하다 보면, 부치지 못했던 답장도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