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11시, 나는 수영을 한다. 수영은 달리기가 그리워서 시작했다. 힘차게 땅을 밟으면서 앞으로 전진하고, 송골송골 맺힌 땀이 시원한 바람에 날아가던 달리기 특유의 감각은 지금도 사무치게 그립다. 허리 수술을 하고 달리기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물속에서라도 달리기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영을 등록했다. 수영장에서 처음 수영을 시작한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은 수영장에서 수도세가 평소보다 더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수영장 물을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부를 정도였으니까. 물을 당기면서 나가는 팔은 무겁고, 물을 차면서 나가는 발은 엉성했다. 근력이 부족하고 신경이 둔해진 게 실감 났다. 호흡도 워낙 짧아져서 25m를 가는 것도 어려웠다. 당시에는 수영을 하는 시간보다 호흡을 고르며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수영을 하러 가는 길은 매일 설렜다.
수영은 여름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내 비밀 안식처였다. 35도가 넘는 날씨에 잔뜩 달궈진 몸을 수영장에 집어넣으면 '파스슥'하고 열기가 식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물속으로 헤엄치기 시작하면 차가운 물의 물성이 온몸을 휘감았다.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지고, 죽어있던 신경도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빨리. 수영을 잘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저, 수영을 하면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어느덧 수영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1km를 한 번도 쉬지 않고 왕복할 수 있는 체력과 근력이 생겼다. 또한, 호흡이 길어지면서 수면 무호흡 증상이 줄어들어 잠을 잘 자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수확이다. 나는 그렇게 속절없이 수영을 사랑하게 됐다.
하루는 수영장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다. 수영을 마치고 나가기 전, 수영 레인 끝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배영으로 오시던 어르신이 나를 못 보고 부딪히신 것이다. 성난 표정으로 일어난 어르신은 나를 죽일 듯 째려봤다. 분명히 잘못을 한 것은 본인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실까?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따지기 대신에 칭찬의 말을 건넸다. "선생님, 어쩜 그렇게 배영을 잘하세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어르신은 자신이 철인 3종 선수라는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수영 공식을 일타 강사처럼 알려주셨다. 3초 전만 해도 툭치면 고함을 지를 것 같은 험악한 사람은 온 데 간 데 없고, 어르신의 표정에선 풋풋한 소년 시절의 순수함이 살짝 비췄다.
수영장을 나와서도 귀여운 어르신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번졌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동차에 시동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답답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를 상쾌한 공기가 채웠다.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옥상달빛의 달리기를 틀었다. 달리기는 수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항상 듣는 음악이다. 전주가 디지털 피아노의 맑은 물방울 소리로 시작되는데, 미처 다 말리지 못해 내 몸에 남아있는 물방울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아 기분이 들뜬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순간 달리기의 첫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다정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가사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안도감이 느껴진다.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니 주변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듯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낙엽들, 선선한 가을바람을 머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뭉게구름들, 아파트 단지가 만든 커다란 그림자 위로 선생님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아이들. 마치, 달리기를 듣는 순간엔 내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사람처럼 건강해진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옥상달빛_달리기
특히,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가사는 오늘 하루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한참 통증이 심했을 때 내 일상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전부였다. 워낙 활동적인 삶을 살았던 내게 단순한 일상은 지루함을 넘어 두려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은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내가 현실에 있는 건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확실히 인지할 수가 없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일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불안 증세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고 나중엔 손이 덜덜덜덜 떨려서 젓가락질도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회복기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옥상달빛의 달리기는 내가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그토록 바라던 보통의 일상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준다.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오후에 앞서 달리기를 들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어렵게 되찾은 아름다운 일상을 오늘도 소중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달리기의 원곡자는 윤상이다. 윤상의 달리기는 전자 드럼의 묵직한 리듬이 포인트다. 옥상달빛의 달리기가 캐모마일 티라고 한다면, 윤상의 달리기는 우유가 살짝 들어간 얼그레이 티 같다. 텁텁한 마음에 산뜻함 한 방울이 필요하다면 옥상달빛의 달리기를, 씁쓸한 마음에 푸근한 위로가 필요하다면 윤상의 달리기를 추천하고 싶다. 웅장한 타악기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부드러운 윤상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날카롭던 내 마음의 칼날이 무뎌진다. "저는 캐모마일, 얼그레이 같은 심심한 티는 안 마시는데요?"라는 독자가 있다면 SES의 달리기를 들어보길 바란다. SES의 달리기는 2000년대 초반의 1세대 아이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희망참이 가득 담겨있다. 마치, 휘핑크림 위에 카라멜 소스를 잔뜩 뿌려준 카라멜 마끼아또 같은 느낌이랄까. 옥상달빛과 윤상은 달리기의 감각을 상상하며 듣기 좋은 반면, 실제로 달리기를 하면서 듣기 좋은 음악은 SES의 달리기다. SES의 멤버 바다, 유진, 슈의 보컬의 각기 다른 음색이 공명하며 발생하는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달리기를 하는 발바닥을 힘차게 밀어줄 것만 같다. 특히, 청량한 멜로디 라인이 중심을 잡으면서 전자 악기의 비트가 음악을 끝까지 흥미롭게 끌고 가는 편곡이 매력적이다. 어쩌면, 달리기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감성을 가장 잘 살리고 있는 것이 SES 같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수영을 하고 달리기를 들으며 상상한다. 언젠가 다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갈 내 자신을.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재활생활도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을 되새긴다. 그런 마음을 눈에 보이는 글로 적고 나니 그날이 당장 내일이 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달리기를 향해. 달리기를 상상하며, 달리기를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