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에 나서는 이유
민주주의. 이 단어를 듣는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타는 목마름의 갈증이나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환희는 아닐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최루탄이 굴러다니는 80~90년대가 아니니까요.
혹시 식상할까요? ‘착해야 한다’, ‘거짓말하지 마라’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아닌 것만 같습니다. 식상하기라도 하면 다행일 겁니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발에 채이지도 않는 작은 돌멩이 같을 겁니다. 주먹만 한 돌멩이라면 발가락에라도 채여서 촉감을 만들어줄 텐데, 어쩌면 이렇게 걸리적대지조차 않는지.
물론 뉴스 헤드라인을 ‘민주주의’가 장식하긴 합니다. 대통령이 내리는 결정에 있을 때마다 야당에서는 ‘반민주적 폭거’라고 비판합니다. 여당에서는 ‘이게 민주주의다’, ‘민주적 절차에 승복하라’고 옹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뉴스를 훅하고 넘깁니다. 민주주의를 걸고 논쟁하는 것은 대부분 할 말이 없다고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의 개념이거든요. 웬디 브라운은 이걸 좀 더 세련되게 말합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웬디브라운, 2017) 표현이야 어찌 되었건, 그러하니 민주주의가 자기편이라며 서로 싸우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보자면 민주주의는 가까이해서는 안 될,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하고 싶은 개념이긴 합니다. 내용도 없는 단어에 사회는 왜 이렇게 이해 못 할 정도로 얽매여 있는 것일까 의문도 듭니다. 피곤하게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가 등장하는 무대는 모두 싸움장입니다. 국회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일터도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사용자와 대립하고 싸운다는 노동조합 내부에서까지도 이 단어를 무기로 해서 날 선 말들이 오갑니다. 조합 내 민주주의가 죽었다느니, 조합 운영이 비민주적이라느니 관중석에서도 귀를 막고 싶은 말들이 칼싸움을 합니다. 아무래도 ‘민주주의’는 친해질 수 없는 단어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흔하고 사용되는 단어임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빈도가 중요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민주주의’ 혹은 ‘민주’가 어떤 용례를 가지느냐죠. 싸움장에서 오가던 말들을 생각해 봅시다. ‘반민주(反民主)’와 ‘비민주(非民主)’와 같이 민주주의에 반하거나 민주주의가 결여된 것은 악으로 취급됩니다. 이러한 공격을 받은 상대방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오히려 반대편에 대해 똑같은 공격을 해대죠. ‘반민주’와 ‘비민주’가 왜 나쁘냐고 되돌려 치는 공격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반박을 행한다면, 그가 맨 처음 받았던 반민주라는 공격은 과장이 아닌 사실로 변합니다. 더구나 상대방의 진실성을 확인해 주는 꼴이 됩니다. 싸움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다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절대선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선 말입니다. 알랭 바디우의 표현으로 바꾸어볼까요?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알랭바디우, 2017) 여기서의 상징이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신정체제에서의 신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러하니 싸움터에서 사용하기에 용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권리, 자유, 생명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말 한마디면 됩니다. 텅 빈 기표이니 이 비난을 틀렸다고도 증명하기도 힘듭니다. 실재가 있어야 대조를 해 보죠. 그렇게 본다면 민주주의로 마녀사냥 역시 가능합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개인적인 산책을 나서볼까 합니다. 굳이 개인적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기존의 해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민주주의가 텅 빈 개념이라고 한다면 기존 해석에 얽매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한 것이지요. 함께 떠나봅시다. 헤매다 보면 가끔은 어디선가 마주치는 일도 있을 테니까요.
* 웬디브라운(2017).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난장.
알랭바디우(2017). 민주주의라는 상징.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