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인가, 인민인가.
앞선 편지에서 저는 웬디 브라운의 표현을 빌어 민주주의를 텅 빈 기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당신은 한 편으로는 동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수사적 표현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이런 입장을 표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실체는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를 텅 빈 기표라고 하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이 정도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지된 민주주의의 개념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진짜 민주주의의 실체가 존재하는지, 그 실체가 개념과 정합성을 가지는지 말입니다.
먼저 사전적 정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풀이합니다. 두산백과사전 역시 그와 비슷하게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라고 풀이합니다. 이걸 쉽게 풀자면 한자 그대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제도 또는 사상, 민(民)이 지배하는 제도 또는 사상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법적 정의는 어떨까요? 아쉽게도 법적 정의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국회가, 언론이 항상 떠들어대는 민주주의지만, 법에 민주주의에 관한 정의규정은 없습니다. 일상에서 너무나 많이, 당연하게 쓰이는 용어이기에 법으로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탓에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축소시키고, 자유민주주의를 낯선 개념인 공산전체주의와 대비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해진 민주주의의 개념도 없는데 이걸 무어라고 부르던지 크게 틀렸다는 생각을 안 할 테니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법률적 정의는 없지만 민주주의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는 조항은 헌법에 존재합니다. 바로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사전적 정의와 헌법적 내용이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관한 어원도 한 번 살펴봅시다. 그리스어로 ‘dêmokratîa’. ‘dêmos’와 ‘krâtos’가 합쳐졌습니다. krâtos의 뜻이 통치 혹은 지배, dêmos의 뜻이 인민 내지 국민이니 사전적 정의와 헌법적 내용이 어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인민과 국민입니다. 인민이 사람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국가라는 틀을 전제하느냐, 전제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민’이라는 단어가 터부시된 탓에* 인민이라고 해석되어야 좀 더 명료한 단어들이 ‘국민’으로 표현되어 온 것이지요,
어쩌면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민주주의를 하나의 국가 내 정치체제라고 전제한다면, 이 정치라는 것은 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 결국 국민하고 인민은 같은 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연설문 하나를 떠올려볼까 합니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에이브러햄 링컨의 그 유명한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이죠.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 정부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배워왔습니다. 민주주의의 3원칙이라고 이름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people을 국민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괜한 의구심일까요? 그저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지, 영토를 위해 존재한다거나 국가 그 자신의 주권을 위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물론입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민인지 아닌지는 국가가 정합니다. 국적은 국적법이 정하고 있으니까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국가가 나의 국적을 박탈해 버리면 끝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허울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에 국가의 성립에 관한 사회계약론을 떠올려보면 이상한 점은 더 명확해집니다. 사회계약론은 사람들이 먼저 존재하고, 이렇게 존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 국가나 사회를 만들었다는 이론입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 이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people을 ‘국민’으로 해석하는 순간 앞뒤가 꼬여버립니다. 사회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민주주의의 개념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생성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인민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다시 국민이 되어버린 인민에게 주권을 부여했다고 논리를 구성하는 것도 말장난입니다, 국가는 국적의 유지 및 박탈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결론은 났는데, 옆으로 비켜나간 의문점이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국민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이 매거진의 연재가 가능할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연재의 목적이 국민을 뗀 민주주의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걸음을 함께 천천히 디뎌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유진오 박사의 헌법 초안
: ‘인민’이라는 단어가 터부시되어 온 것은 광복 이후로 보인다. 북한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선점해 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유진오 박사가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한 헌법초안에서는 제2조의 내용은 “한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였다. 하지만 국회 본회의를 넘어가면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로 수정되었다(유진오, 1980).
**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 1863년 11월 19일, 미국 남북 전쟁의 한가운데였던 펜실베이니아 주의 게티즈버그에서 죽은 장병들을 위한 추도식이 열렸다. 여기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2분 남짓의 짤막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링컨의 가장 유명한 연설로 기억된다. 재미난 것은 링컨 역시 이 연설이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연설문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하는 말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랫동안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분들이 여기서 이루어 냈던 업적만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참고문헌
유진오 (1980). 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윤석열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2023.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