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승광 Nov 09. 2023

우리 헌법은 '인민'을 빼앗겼다

국민, 인민, 그리고 시민

앞선 편지에서 저는 국민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모순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국가 우선주의에 근거한 눈속임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모순적이라는 평가는 지금의 시선에 불과합니다. 모든 제도, 특히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제도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타당성을 지닙니다.


국민민주주의의 기원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는 이 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를 벗어나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입법의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입법의회를 구성은 선거로 행해지는데, 이를 위해 1791년 프랑스헌법에 국적에 관한 규정이 도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에 참여할 사람들의 선을 긋는 작업이 필요했던 거죠. 


이 과정을 본다면 국민민주주의를 국가를 인민에 우선시키는 제도라고 평가절하 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국가라는 건 이미 존재해 있었거든요. 이 상황에서 국민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을 한 명의 절대군주에서 빼앗아 다수 국민에게 건네주는 역할을 했었던 것입니다. 주권자를 폭발적으로 넓혔던 것이지요. 국민민주주의의 역사적 가치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작, 325 × 260 cm , 루브르 박물관


하지만 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점에서 국민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옹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법 초안을 만든 유진오 박사는 아래와 같이 회고합니다.


“인민이라는 말은 구대한제국 절대군주제 하에서도 사용되던 말이고 미국 헌법에 있어서도 인민(people, person)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citizen)과는 구별되고 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中-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개념일지 몰라도 왕정이 무너지고 일제 강점기에서 막 벗어난 대한민국에서는, 국민민주주의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취지를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 유진오 박사의 진단일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오로지 ‘인민’이라는 말을 북한에 선점당했기 때문일까요? 근본적 원인을 거기서 찾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의 사회 분위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더 합당헤보입니다. 당시 현실에서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민(人民)으로서의 개인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개인에게 오직 국가와의 일체감이 부여되는 국민(國民)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습니다(김성보, 2009). 이것까지 고려한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국민민주주의는 없어져야 할 단어로 치부되어도 과하지 않아 보입니다. 


한편, 유진오 박사의 글에서 시민(citizen)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의 구성원을 국적 유무에 따라 국민과 외국인으로만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 구성원의 분류는 국가마다 조금씩 다른 체계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국가 구성원을 크게 시민(citizen)과 비시민(non-citizen)으로 나눈 후, 비시민을 국민(national)과 외국인(alien)으로, 외국인을 또 다시 이민자(immigrant)와 비이민자(non-immigrant)로 나누고 있습니다(윤혜선, 2012). 위에 언급한 유진오 박사의 글에서 미국의 국가 구성원이 ‘국민’이 아닌 ‘시민’으로 표현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과 달리 캐나다는 국가 구성원을 시민(citizen), 영주권자(permanent resident) 및 외국인(foreign national)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시민과 비시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가지느냐는 국가에 따라 다르지만, 시민은 제도정치에 참여한다는 혹은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데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한국과 같이 시민 개념이 별도로 존재치 않는 국가에서는 국민과 시민을 동의어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있어 보입니다. 국민이 국적을 가진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정적(靜的)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에 참여하고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동적(動的) 개념이니까요. 


그리고 이 시민이라는 개념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모든 국민에게 피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을 부여한 시기는 오래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기 시작한 시기만 봐도 18세기입니다. 말이 좋아 시작이 18세기지, 유럽 주요국이나 미국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받은 건 20세기 들어서입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의 한 요소로서 국민이라는 개념은, 절대왕정이 깨진 이후에는 그 효용성을 잃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했던 개념은 오히려 시민인 것이지요. 시민은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의미했고,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더욱 그 범위가 좁아집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은 시민의 폭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신진욱, 2010).  



※ 참고문헌

김성보 (2009). 남북국가 수립기 인민과 국민 개념의 분화. 한국사연구, 144.

신진욱 (2010). 시민. 책세상.

유진오 (1980). 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윤혜선 (2012). 다문화사회의 사회통합을 위한 단초로서의 이민제도의 고찰. 공법학연구, 13(2).

이전 02화 국민민주주의 개념은 모순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