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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Sep 11. 2024

‘버티는 힘’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기껏해야 단역이나 해본 사람인데 주인공을 하라고요?

거짓말처럼,

연극의 원톱 주인공을 맡은 적이 있었다.




대학 2학년 스물한 살.

동아리의 연합 행사에 올릴 연극이었다. 못해도 200명 이상 참가하는 큰 행사였는데,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연극 무대에 내가 주인공으로 서게 된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크리스마스 행사 때 대사 한마디 있는 단역이나 해봤지 연극을 해본 적도 없고 무대 공포증이 있는 데다 주인공은 남자니까 당연히 열외일 줄 알았다. 그런데 연극 연출을 맡은 선배가 오디션을 보라고 했고, 누구나 보는 오디션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덜컥 주인공으로 낙점이 된 것이다. 그때의 아찔함이란… 그냥 한 번 봐본 거다, 연극의 ‘ㅇ’도 모른다, 무대에 서면 목소리가 떨린다, 얼굴이 빨개진다 등등 주인공을 할 수 없는 온갖 이유를 늘어놔도 연출 선배는 무조건 내가 주인공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평소와 다르게 앞뒤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걸 처음 봤다.


“아무나 주인공을 하나요?

난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못하겠다고 버티자 선배는 일단 테스트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소심하고 간이 콩알만 하고 목소리도 작고 결정적으로 여자인데 뭘로 나를 테스트하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해보라고 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주인공을 바꾸겠다고!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고 그들에게 얼마든지 기회가 갈 것 같아 선배의 제안을 승낙했다. 준비 기간이 세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좀 걸렸지만 분명 내 능력치를 너무 높게 본 선배가 먼저 나를 내치리라 자신했다.


그렇게 연습이 시작됐다.

제대로 된 연극은 처음 해 보는 거지만 당연히 연기에 대한 트레이닝을 받고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짜는 게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연극의 기본은 체력이라며 연출가 선배는 2주 동안 체력 훈련만 시켰다. 계단 오르내리기, 기마자세 유지하기, 운동장 10바퀴 뛰기 등 고강도 체력 훈련. 이런 게 연극이라면 당장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아무리 돌도 씹어 먹을 20대라고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체력 훈련을 매일 하는 건 무리였다. 하소연은 먹히지 않았다. 선배는 일단 버티라는 말만 반복했다. 2주만 버텨 보라고! 그렇게 반 강제로 버틴 2주가 지나자 억지이긴 했지만 기마 자세를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았다. 일부러 부들부들 떨어보려고 해도 떨리지 않을 정도로 다리에 근육이 붙었다.

체력 훈련이 끝나자마자 발성 및 발음 연습을 했다. 처음엔 엉망진창이었던 발성과 발음도 매일 꾸준히 연습하자 점점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늘 자신 없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던 나인데, 이런 것도 꾸준히 하면 좋아진다는 걸 알고 신기했다.


하지만 모든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해도 원톱 주인공은 대사도 많은데 그 많은 대사를 외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 역시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선배가 최종적으로 나를 주인공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한 날 아무래도 주인공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토로하자 선배가 말했다.


할 수 없는 게 어딨어?
일단 버텨봐!
버티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주연을 맡았다.

행사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때부터 연극만을 위한 두 달을 보냈다.

매일 체력 훈련을 했고, 발성을 다지기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연습했고, 대본의 1/3을 차지하는 주인공의 대사를 외우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수십번도 더 들었지만 그때마다 일단 버텨보라는 선배의 조언을 아로새겼다. 책을 외워서 시험을 보는 것과는 달리 대본을 외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일은 보통의 담력으로는 힘든 일이었기에, 정신줄을 놓더라도 대사가 입에서 술술 나오려면 외우고 또 외워야 했다. 하지만 역시 연기는 대사만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고 연출 선배는 연습 중에 자꾸만 ‘컷’을 외쳤다.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이렇게 목소리가 크면 되겠어? 연극은 소리만 고래고래 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처음엔 발음 좋고 목소리만 크면 된다고 하더니 이젠 발음 좋고 목소리만 크면 다냐며 다그치는 선배의 말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캐릭터 연구라는 걸 했다. 내가 연기하는 그 사람이 어떤 생각과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말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시간은 없고 연극은 처음이고 대사는 많고 해서 외우기 바빴기 때문이다. 남은 한 달 동안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대사 한 줄을 어떤 마음으로 내뱉을지 생각해야 했다.


주인공은 자기 잘난 줄만 아는 이기적인 가톨릭 사제이다. 해코지한 사람한테 해코지하는 게 주특기인 데다 불평불만이 많은 아이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신부이기 때문에 보호되어야 하고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매 순간 강조한다. 그래서 때로는 코믹하고 우악스럽게 행동하며 같이 살아갈 사람들과 팽팽하게 대결하지만 결국엔 대화와 타협으로 그들과 화해하며 상생을 도모한다. 내뱉는 말과 행동만 보면 영락없는 동네 건달이지만 억울한 사람을 돕고 아픈 사람을 다독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니 대사 하나하나가 허투루 읽히지 않았다.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억양과 톤을 살리고, 한마디 단어만 들어도 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하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신중히 대사를 던졌다. 점점 인물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나라는 사람을 통해 최대한 그 사람을 끌어내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감정까지 갖게 됐던 것 같다.


디데이, 무대에 조명이 탁 켜졌다.

“지난 봄날이었나요?”

첫 대사를 하고 얼마 후 박수소리와 함께 관객석의 조명이 환히 밝혀지고야 연극이 끝났음을 알게 됐다. 기억에 없는 40분 간의 연극 무대는 뒤풀이 자리에서 얼굴도 모르는 동문 선배님들의 후기를 듣고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신부님이 어찌나 얄밉던지 무대로 뛰어 올라갈 뻔했네, 신부님이 여자였어?, 코믹 연기가 아주 맘에 들던데 등등 선배니까 할 수 있는 칭찬 일색이었지만 뿌듯했다. 떨지 않고 대사도 안 까먹고 끝까지 연습하던 대로 잘했구나 싶었다. 연극의 여파로 한동안 사람들은 나를 주인공 이름인 ‘돈 까밀로’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제야 밝혀진 사실 하나.

연출을 맡은 선배가 처음부터 나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건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사제 역할을 남자가 아닌 여자 배우를 쓰고 싶었는데 키가 큰 여자는 나 밖에 없어서 무조건 밀어붙인 거라고. 중간에 낙오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끝까지 살아남아 줘서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선배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특별하게 대해주면 그만큼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걸 몸소 경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연극을, 게다가 주인공 역할을, 무대공포증이 있는 내가 거짓말처럼 해냈으니 말이다. 아무나 주인공을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데 외면했던 진실을 받아들이게 됐달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 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공포증이 있으니까 할 수 없어, 여자니까 할 수 없어, 목소리가 작으니까 할 수 없어, 체력이 안 되니까 할 수 없어.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늘어놓다보면 나는 당연히 주인공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억지이긴 했지만 막상 해내고 보니 힘들었지만 체력과 발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강됐고 여자인 건 연기력(?)으로 커버했고 그러다보니 무대공포증까지 극복하게 됐다. 불편하기 짝이 없던 연극 주인공이라는 자리가 잠시나마 내게 영광을 주는 자리가 된 것이다. 나같은 사람에게는 단역이나 까메오가 제격이라고 여겼던 과거를 벗고 주인공으로 거듭난 그때의 기억이 소중한 이유다.



당시 연극은 죠반니 과레스키 원작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을 각색한 극본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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