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몸의 이상신호
매일 걷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퇴근 후 소파에 눕는 대신 도서관으로 가는 삶은 점점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여전히 불편하고 언제든 발 뺄 준비가 되어 있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용쓰고 있다.
간신히 버티기를 하며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는데 뜻밖의 이상신호에 당황했다.
일반 건강검진을 하면서도 내내 산부인과 검사를 꺼린 건 검사과정이 불편하고 아프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재작년에도 검사를 하지 않았었다.
혈압이 149/101로 나와 당황하고 있는 한 중년 여성을 보면서 문득 산부인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하루 휴가를 내어 건강검진을 하려고도 했지만, 귀찮고 하기 싫은 걸 하나씩 도장깨기하고 있는 요즘이니 더더욱 산부인과 검진까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4년 만에 산부인과로 향했다.
검진 전 예진실의 실장님은 4년 전과 똑같은 말로 초음파 검사를 유도했지만 하지 않겠다고 했다. 실비가 된다고 해도 굳이 초음파 검사까지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른 때보다 더 아팠던 유방암 검사를 마치고 한 시간을 기다려 자궁경부암 검진을 위해 진료실에 들어갔다.
문진표에 특별한 내용이 없는 걸 확인한 의사는 바로 검진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검진 준비를 마치고 의사가 들어와 검진을 시작했다.
초음파 먼저 볼게요.
예? 초음파요?
말릴 새도 없이 의사는 초음파 검사를 시작했고 난 속으로 실장을 욕하고 있었다. 분명 초음파는 안 한다고 의사를 밝혔는데 강행한 건 사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의사는 초음파 화면을 보라고 말하며 문제가 없는 3cm짜리 근종을 보여줬다. 크기가 그 정도라는 걸 잘 보이게 짚어가며 설명해 줬다.
문제는 이건데… 여기 보이는 이 근종이 좀 크네요. 가로 9cm, 세로 6.5cm 정도.
크기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아 그냥 네네 하며 대답만 열심히 했다.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로 돌아오자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본 자궁근종은 수술로 떼어내야 돼요.
약물 치료 같은 건 안 되나요?
네. 수술해야 합니다. 주먹만 한 게 자궁 안에 있는 거예요. 떼내야겠죠?
‘주먹만 하다고?’
아마 자궁을 드러내야 할 거예요. 근종만 떼내면 또 생길 수 있으니까.
자궁을 드러낸다고요? 꼭 그래야 하나요?
네 아마도.
그때부터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자궁은 임신을 위한 아기집일 뿐이에요. 자궁 드러내는 거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데…’
수술하면 회복하는 덴 얼마나 걸릴까요?
한 달 정도?
‘한 달인데 괜찮은 거 맞아?’
진료의견서 써줄 테니까 일주일 안에 대학병원 가서 수술날짜 잡아요. 더 커지기 전에.
더 커지기 전에…
4년 전엔 3cm였던 자궁근종이 2년 전 검사를 건너뛴 나에게 보란 듯이 큰 놈이 되어 있었다. 수술을 꼭 해야 할 만큼. 착잡하고 한심했다. 나름 건강을 챙기겠다고 운동도 시작하고 안 먹던 비타민도 먹기 시작한 지 이제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자궁적출이라는 큰 수술-의사는 큰 수술은 아니라고 했지만-
을 하게 되다니…
아무리 불편해도 억지로라도 2년 전 검진을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진료의견서를 받아 병원을 나왔는데 하늘의 구름이 두루미의 깃털처럼 넓고 우아하게 퍼져 있었다. 하루종일 하늘만 보고 있어도 될 것처럼 눈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졌다. 얼마 전부터 코에서 김밥 냄새가 살살 났지만 막상 사 먹어지지 않았는데 왠지 큰 일을 치른 것 같은 오늘은 꼭 김밥을 먹고 싶었다. 굵게 만 참치김밥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대기시간에 읽으려고 들고 간 책과 아이패드, 김밥을 든 손이 꽤나 무거웠지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오르기를 빼먹고 싶지 않았다. 벌써 두 달 넘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도 종아리와 허벅지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는지 허벅지가 땅기고 숨은 거칠어졌다.
운동이랄 것도 없는 이 루틴이 나를 건강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건 착각일까? 조금 더 빨리 시작했어야 했나? 계단 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고강도 운동으로 내 몸을 단련했어야 했나?
겨우 이런 걸로 나를 탓해봐야 돌아오는 건 허탈함 뿐이었다. 그럴 시간에 병원 예약이나 해야지.
몇 년 전부터 자궁근종으로 추적 관찰 중인 작은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가 다니는 대학병원으로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추적관찰 중인 언니에게도 내가 가진 근종의 크기는 많이 컸나 보다.
왜 그렇게 클 때까지 뒀어…
나보다 놀란 것 같은 언니는 벌써 동생의 자궁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대학병원 예약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틀 뒤 오전 예약을 잡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틀었다. 영화 <도둑들>이 한창 방영 중이었다. 여러 명의 도둑들은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믿음이라곤 없는 삶을 살아간다. 누가 누굴 돕는 것 같다가도 다시 배신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반복했다.
나를 속이는 건 세상일까 병일까?
아니면
불편하고 귀찮은 일을 미루고
병이 나를 피해갈 거라 자만한
나 자신일까?
걱정도 원망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내내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꿈은 쫓고 쫓기는 스릴러 장르로 거의 노벨 아카데미상급의 긴장감이 있는 영화 한 편으로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