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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13. 2021

‘삶’은 달걀 하나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매 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오래 기억되는 순간은 그 긴 시간만큼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의 맛은 그래서 오래 끓인 곰탕처럼 더욱 진해지는 게 아닐까?




국민학교 1학년   '앞으로 나란히' 시키는 선생님이 싫었다. 선생님이 '앞으로 나란히' 시키는  반듯하게 줄을 맞추기 위해서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앞에  있는 친구의 뒤통수를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무조건 ‘앞으로 나란히 시키는 선생님이 싫었다. 그게 싫은 이유는 나의 왼팔 때문이다.


앞으로 나란히 하면 남들보다 유난히  튀어나오는 왼팔 팔꿈치가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 맘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의 구령이 들리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고 '작은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달려와 팔을 쭉 뻗으라고 잡아당기는 선생님이 정말 싫었다.


2학년이 된 나는 여름방학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왼팔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술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아홉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수술이 겁나지 않았다. 수술보다 친구들이 팔 병신이라고 놀리는 게 더 싫었다. 수술대에 올랐을 때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느낌이 나니?"

"네. 슥슥슥슥! 뼈 자르는 거예요?"

"아니이? 잘 참으면 아주 예뻐질 거야!"

"네!"

"아프니?"

"아뇨. 하나도 안 아파요!"


의사의 목소리가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났지만 이 의사를 믿고 따르면 예뻐질 것 같았다. 수술 후 꿰맨 자국 사이에 핀셋으로 소독 솜을 집어넣고 쑤셔대도 울지 않았다. 팔 병신이었던 내가 이제 정상이 될 테니까!


깁스를 한 채로 후끈한 여름을 보내고 드디어 깁스를 푸는 날! 시커멓게 때가 낀 팔을 보는 것도 괜찮았다.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작고 어린 소녀의 팔 중턱에 10센티가 넘는 검붉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이럴 수가!


"어머나! 이게 뭐예요? 언제 없어져요?"


엄마의 물음에 의사가 대답했다.


"없어지진 않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스무 살 넘어서 성형 수술하면 돼요. (내게 콧구멍을 들이밀며) 괜찮지?"


괜찮냐고?  의사가 제정신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코앞에 있는 사기꾼의 콧구멍을 밀쳤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왜 더 큰 혹을 붙여놓은 거야???


그 후로 난 여름이 싫었다. 벌건 생선가시 모양의 흉터를 가진 팔꿈치를 드러내는 게 죽을 만큼 싫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내 팔에 대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이고! 여자애가 어쩌다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똑같은 말을 10년 동안 계속 들어야 할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소심하지만 확실한 조치였다. '상처를 없앨 수 있을 때까지 가리는 것!' 그래서 남은 국민학교 4년 동안 여름이 오면 반팔 대신 7부 소매 옷을 입었다. 조금이라도 소매가 짧으면 흉터 아래까지 어떻게든 끌어내렸다. 엄마가 신경 써서 고른 원피스는 항상 소매가 죽죽 늘어진 형편없는 옷이 되고 말았다.


특단의 조치가 먹히지 않는 때도 있었다.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복에 매달린 소매는 어쩜 그렇게 땅딸한지. 버스를 탈 때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남학생들이 신경 쓰였다. 방법을 바꿀 타임이었다. ‘가리는 대신 보이지 않게 숨자!’는 게 내가 찾은 방법이다. 흉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적은 자리인 왼쪽 창가 자리에 앉고 -오른쪽 창가 자리에는 절대 앉지 않았다-, 서서 가야 할 때는 무조건 오른쪽 창가를 바라보고 섰다. 뒤에 앉은 사람들이 왼팔의 흉터를 보지 못하도록.




스물여덟 살 여름에 성형외과를 찾아갔다. 부푼 기대를 안고 갔는데 의사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엉덩이 살 떼서 붙이는 건 알고 있죠?”

“네? 엉덩이 살을 왜에…?”

“엉덩이만큼 살 많은 데가 없으니까. 엉덩이 내놓고 다닐 일은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은...?”

“절 한번 믿어보세요. 깔끔하게 없앨 수 있어요.”


믿어보라는 말이 그리 미덥진 않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20여년의 설움을 다시 겪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 자리에서 성형수술 날짜를 잡았다.

 

디데이-1.

집으로 작은언니 가족이 놀러 왔다. 오자마자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 놀던 어린 조카가 내 왼팔에 기대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

 

"이모! 이게 뭐야?"

"음..... 이건..."

"나무야?"

"어? 엉!"

"예쁘다!"

"이게... 예뻐?"

"응! 나도 나무 갖고 싶어!"


순진한 그 말에 웃음이 났지만 한편 씁쓸했다. 그때 엄마가 손녀딸이 좋아하는 삶은 달걀을 내오셨다. 엄마는 손녀딸 대신 내 손에 먼저 달걀을 쥐어주셨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난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20년 전의 내 방에 가 있었다.




그날 친척 언니들과 함께 작은 방에 모여 놀고 있었다. 놀이를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 다퉈 키보다 10센티 정도 작은 재봉틀 위로 올라갔다. 폭이 좁은 재봉틀에 다섯 명이나 되는 꼬마들이 질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올라탔다. 딱히 명당자리랄 곳도 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자리싸움을 하던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나름대로는 균형을 잃지 않고 착지를 한다고 한 게 그만 왼쪽 팔꿈치를 방바닥에 댔고, 그 순간 벼락이 칠 때처럼 번쩍하는 게 눈앞에 지나갔다.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벼락이 치고 팔꿈치가 아파왔다. 그 후엔 자지러지게 우는 것 밖에 할 게 없었다. 같이 놀던 언니들이 나를 달래는 것 같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만 보이고 통증만 느껴졌다. 엄마가 울음소리를 듣고 오신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내 눈엔 눈물만 보였다.


한참을 우는데 손에 뭔가 따뜻한 게 잡혔다. 뭔지 궁금해 눈물을 닦고 손을 들어 봤다. 내 손엔 껍질을 벗긴 삶은 달걀이 쥐어져 있었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 그쳤다. 엄마가 달걀 위에 소금을 뿌려줬다. 순식간에 달걀 하나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너무 맛있었다. 엄마는 달걀을 하나 더 손에 쥐어 주었다. 삶은 달걀 두 개를 맛있게 먹고 나니 팔도 안 아픈 것 같았다.


벼락을 보고 두 시간 후 난 근처 정형외과의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의사는 돌팔이인지 무면허인지 부러진 왼팔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그 수술을 마지막으로 구속됐다.




팔이 부러지는 고통을 기억하고 20년을 악몽 속에 살았는데도 삶은 달걀의 따뜻한 맛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스물여덟 살의 내 손에 엄마가 쥐어준 삶은 달걀의 온도는 팔이 부러진 다섯 살의 내 손에 쥐어준 삶은 달걀과 같았다. ‘맛' 또한 2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 20년의 악몽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이모! 나도 나무 심어줘!"

"흐흐흐! 이건 이모한테만 있는 거야!"

"왜에? 나도 나무우우우!!"


나무를 갖고 싶다며 조카는 울었다. 내가 그토록 떼 버리고 싶었던 그 흉터 자국이 예쁘다면서...


디데이.

난 성형외과에 가지 않았다. 나만이 가진 그 나무를 소중히 가꾸기로 마음먹었다.




사진 / 구글 이미지 : 한경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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