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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14. 2021

멍게 밖에 난 몰라

사랑이 뭐길래

혼자서 오래 살다 보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점점 명확해지고 그 경계를 허무는 건 더 어렵다. 하지만 너무 확고해서 개인 취향이 아닌 꼰대처럼 보일 수 있는 좋고 싫음이 어쩌면 그 사람의 아픔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겠다.

멍게가 내겐 그렇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거하게 마시고 놀았다. 그렇게 신나는 생일파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친구들은 '특별한 선물'까지 준비했다며 내 눈을 가렸다.


"뭔데 그래?"

"기대하시라! 니가 이걸 보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걸?"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인데 내가 당장 죽어도 좋을 선물까지 준비했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준비가 다 된 친구들이 '짜안!' 하며 가렸던 손을 내렸다. 눈앞엔 믿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었고 난… 당장 죽고 싶었다. 그 특별한 선물은 '멍게'였다. 멍게로 만든 탑, 멍게 케이크! 껍질을 벗기지 않은 통 멍게를 쌓아 올려 그럴듯하게 만든 케이크 위에는 촛불까지 활활 타고 있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꾹꾹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시는 먹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던, 그래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멍게인데...


친구들은 멋도 모르고 좋아라 하며 박수를 쳤다.




멍게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를 운명이라고 생각했듯 멍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남자는 나를 처음 봤을 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웃는 얼굴에 반했다나 뭐라나! 그런데 묘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도 그에게 반해 버렸다.

 

기름유출이 있었던 태안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그곳에서 한 달간 자원봉사를 했다. 숙소에 함께 머물면서 그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까나리액젓으로 버무린 봄동을 아침상에 올리고, 조개에 갖은양념을 올려 구워주고, 두릅을 살짝 데쳐 막걸리 상을 차리고, 쑥갓과 콩나물을 적당히 넣어 꽃게탕도 끓여주었다. 제철에 맞는 음식을 찾아먹고, 제철에 맞는 요리를 할 줄 아는 건강한 남자였다. 오랜 자취생활에도 요리다운 요리를 못하던 나에게 그 남자는 잘 먹는 법을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이었다.


집에서 밥을 해 먹는 날이 더 많았지만 우리는 맛집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했고, 부산까지 가게 되었다. 국제시장의 명물 매운 떡볶이를 먹고 곧바로 자갈치시장으로 가서 도미와 상어 회, 산 낙지까지 푸짐하게 주문했다. 그 정도면 충분한데 그는 기어코 멍게 한 사발까지 추가했다. 생선회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멍게는 별로라고 강하게 부정하는 내게, 4월의 멍게 맛은 눈물이 찔끔 날만큼 훌륭하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목구멍에 흘려 넣은 멍게 맛은...


세상에 이런 맛이 존재한다니... 달고 부드러운 식감이 세포 하나하나를 발딱발딱 일으켜 세웠다. 멍게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미소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 남자가 사랑스러운 만큼 멍게도 사랑스러웠다. 처음으로 그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멍게 살을 대 여섯 개씩 집어 흡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껍질을 모조리 씹어 먹은 데다 접시에 남아있는 국물까지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날부터 그에게 미친 건지 멍게에 미친 건지 그를 만나는 3년 동안 멍게가 눈에 띄기만 하면 먹어 재꼈다. 뭐든 하나에 꽂히면 정신 못 차리는 나이지만 먹을 것에 꽂혀보긴 처음이었다.


그와 만나며 커진 사랑만큼 멍게에 대한 집착도 꽤 찐득했다. 끈적끈적한 사이가 된 멍게를 뚝 끊기로 결심한 건 그가 나와 헤어지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1년간 해외에 취업해 일하고 있던 그가 전화기에 대고 우리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했다.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 후면 귀국해서 상견례를 하고 웨딩촬영을 하고 예물을 고르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는데...


"자기야! 지금 누구랑 얘기해?"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그와 나의 역사가 끝났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참 멍게가 맛있을 무렵인 그때 더 이상 멍게를 찾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설움이 북받쳤다.


멍게는 내게 특별한 것 그 이상이었다. 사춘기 소녀처럼 첫사랑 멍게는 곧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거리 연애를 하며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빈자리를 멍게가 채워줬기 때문이다. 그만큼 멍게와 그 사람은 이체동심(二體同心), 곧 하나였다. 멍게가 그이고 그가 멍게였다.




그와 헤어진 후 난 더 이상 멍게를 먹지 않았다. 아니, 멍게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1년도 채 안 되어 생일상에 멍게가 올라온 것이다. 꼭꼭 숨겨놨던 쓰린 과거가 속살을 내민 것이다. 제철도 아닌 때에 만난 12월의 멍게 앞에서 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슬프고 속상해서 우는데 친구들은 기뻐하며 웃었다.


"자! 감동은 이제 그만하고, 멍! 케! 시식이 있겠습니다!"


한 친구가 젓가락 한가득 멍게를 들어 올렸다.

 

'내가 저걸 먹으면 그가 다시 돌아올까?'


바보 같은 기대를 하며 멍게를 받아먹었다. 그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멍게는 꿀맛이었다! 4월의 멍게만큼 맛있었다. 그날의 멍게만큼 맛있었다. 그래서 난 멍게 껍질을 몽땅 씹어 먹고 국물까지 다 마셨다. 우리 처음 만난 날처럼!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멍게가 나를 혼자로 만든 게 아니다.
멍게는 나를 버리고 떠난 그가 아니다. 멍게를 먹을 때마다
그를 소환할 필요가 없다. 멍게는 그냥 멍게다.
이제야 그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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