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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Jun 07. 2019

위험한 시간, 위험한 장소는 어디든 위험해

호주 생활: 치안

호주도 치안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안이 약한 지역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리 치안이 좋은 지역이라도 사람이 드문 시간에 홀로 돌아다니는 것위험하다.


두 달 전 호주 여행 중에 멜버른에서 5박 6일 머물렀다 (본래 추억을 씹으며 5일만 있으려고 했던 건데 바보같이 다음 도시인 태즈매니아의 호바트 항공권을 잘못 예약했다. 예약 취소 벌금이 너무 비싸서 결국 멜버른에서 하루 더 있기로 했다). 플레밍턴이라는 지역에 있는 서비스 아파트를 예약했다. 플레밍턴은 멜버른 북쪽 지역에 있어서 시설이 정말 좋은 아파트인데도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다. 멜버른은 한국과 비슷하게 남쪽에 부촌이 많은데 반해 시드니는 부유한 동네가 북쪽에 있다. 즉, 내가 머물렀던 플레밍턴은 다른 지역에 비해 치안이 좀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추억팔이하며 쏘다니다가 멜버른에서 가장 사랑하는 포트멜버른의 밤하늘을 바라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트램 (멜버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에 몸을 실었다.  


어느덧 익숙한 상점들이 보이고 시간을 확인하니 밤 10시 30분이었다. 밤문화가 발달한 한국에선 전혀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호주에선 이 시간에 문을 연 상점은 오직 술집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딱히 겁이 없는 나는 (회사에서 야근하다가도 새벽 2,3시에도 가로등도 거의 없는 길을 혼자 1시간을 걸어 집에 돌아가곤 했다) 별생각 없이 숙소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다.


트램이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다. 키가 큰 건장한 아프리칸 남성이 달려오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아, 방금 트램 놓쳤구나.’

짜증 날 만도 하지. 밤에는 15분에서 30분은 기다려야 다음 트램을 탈 수 있다.

그러고는 길을 건넜다. 그런데 그도 똑같이 길을 건넜다.

‘아, 트램 놓쳐서 걸어가려나 보네.’

길 모서리에서 숙소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건넜다.


그런데 웬걸? 그가 또 따라 걷는 것이었다. 찻길 옆이라 하여도 딱 그 숙소만 있을 뿐 근처는 문 닫은 상점 밖에 없는 데다가 가로등도 거의 없는 곳이라 갑자기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뭐, 설마. 그냥 자기 가는 길 가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혹시 몰라서 발걸음을 재촉했고 아파트 보안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곳은 서비스 아파트라 호텔처럼 1층에 사람이 있지 않고 우편함이 있고 그곳을 지나 조금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안전한 곳에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괜스레 죄 없는 사람을 의심했나는 죄책감을 느낄 때 갑자기 쾅하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아보니 유리문을 양주먹으로 치면서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안카드로 여는 문이 아니었다면 그는 유리문을 열고 그대로 들어올 수 있었을 테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1층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등골이 오싹했다.

시드니에 돌아가 친구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친구는 그날 밤 무서워 잠을 잘 못 잤다고 하더라, ‘언니, 생각해보니까 잘못했으면 언니를 영영 못 보게 되는 거였어요. 언니는 너무 겁이 없어요!’ 라며 날 꾸짖으며.


호주 대학에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토요일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트램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학교와 가까운 곳에 셰어하우스가 있었는데 멜버른에서 치안이 매우 좋은 동네중 하나였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정류장에 내렸는데 갑자기 여자애들 소리가 들리는 거다. 뒤돌아보니 같은 트램에 타고 있던 10대 후반의 여자애들이 놀란 얼굴로 소리를 치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잠시 보이고 트램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그녀들의 시선이 닿았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두운 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트램에 함께 타고 있었던 백인 남자였다.


트램 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주거지역이라 가로등이 거의 없었다. 남자가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혹시 몰라서 트램이 다니는 큰 찻길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가 가버리면 다시 그 길로 들어갈 생각으로.

큰길에서 잠시 가끔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남자가 보이지 않길래 다시 길을 나섰다. 조금 걸어가니 큰 가로수 나무 뒤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어 내가 오는지 확인하는 그 남자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 남자는 내가 트램에서 내리는 걸보고 따라 내린 거구나. 그래서 그 애들이 나에게 경고해주려고 한 거구나.’

너무 무서워서 그대로 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다시 큰 찻길로 나왔다. 적어도 그곳은 가로등 때문에 길이 환했고 차들이 지나다녔으니까.


어떡해야 할지 모르는 채 두려움에 떨었다. 

친한 언니랑 친구에게 전화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그대로 큰 길을 걷다 집으로 가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찻길이 아닌지라 그 길도 어둡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는 내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니까 그 방향으로 오지 않았을 것 같았다. 초긴장 상태로 온신경을 곤두세운 채 마음을 졸이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10여 년이 흘러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나의 반응이 이리도 다른 걸 보면 두려움에도 내성이 생기나 보다.

사실 이런 건 내성이 생기면 안 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왜 모두 멜버른에서 일어난 걸까? 

멜버른이 시드니에 비해 치안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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