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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Jan 15. 2024

동해

따뜻하다: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급하게 예약하고 간 호텔은 시각적 아름다움이 생활의 편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가운데만 오목한 대접 그릇 같이 생긴 거대한 나무 침대가 커다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을 가로질러 발코니로 가려면 한쪽 벽에 붙어야 했다. 침대에 몸을 누우려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침대 모서리를 넘어 들어가야 했다. 가우디의 까사바티오가 연상되는 화장실은 유연한 곡선으로 인해 비누를 놓을 평평한 공간이 없었다. 지나치게 큰 발코니는 구엘공원의 도마뱀 분수연상되는 매립형 욕조가 있었는데 맞은편에는 건물 구조물이 한참 바깥으로 뻗어있어 파도가 보이지 않는 조용한 바다와 하늘이 액자 같이 담겨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독특한 모습에 감탄하며 놀이처럼 방안을 돌아다녔겠지만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버린 까닭에 앉을 의자도 없어 침대에 누워 있다가도 화장실에 갈 때마다 침대 모서리를 넘다 보니 한숨이 나왔다.

액자 안에 담긴 그림처럼 보이는 동해

아무런 방해물 없이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창문으로 전날과는 또 다른 일조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너무 무리를 했던 건지 9시까지 늦잠을 잤다. 체크인할 때 갤러리 할인권을 주길래 호텔 근처에 같은 이름의 갤러리가 있나 보다 했는데 1층 로비 바로 옆에 갤러리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어젯밤 급하게 조금 외진 곳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쉬워 갤러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1시간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며 아무 기대 없이 시작한 갤러리 투어는 많은 작품들이 다양한 테마로 전시되어 있어 나는 진지해져 버려 꼼꼼히 감상하다 보니 예상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다. 고요했던 호텔과 달리, 선생님들과 견학온 초등학생 아이들도 있고 관람객들이 꽤 많은 것으로 보아 본래 갤러리가 더 유명한 곳이었던 모양이다. 경험이 많아서 추억할 거리가 많은 사람으로 죽고 싶다는 게 좌우명이라서 선택권이 있을 때 안 하는 쪽보다는 하는 쪽을 주로 선택하는데 이번에도 생각지 못한 특별한 하루를 선물 받았다.

특정 위치에 서야만 보이는 모서리 끝에 앉은 빨간색 사람 조형물
바다가 보이는 파이프 숲과 알쓸신잡에 나왔던 피노키오 박물관 입구

앞뒤로 배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내리막 차도 옆에 좁지만 자전거 길이 분리되어 있어서 전날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정동진 역으로 걸었다. 내리막 길 끝 해변이 나타났고 그 앞에 기찻길이 놓여 있었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놓인 차가운 철로, 그 밑에 깔린 울퉁불퉁한 회색빛 돌, 그 위에 서면 멀리 보이는 소실점으로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 끝에는 평범한 기차역이 있을 걸 알면서도 뭔가 다른 세상이 존재할 것 같은 오묘한 기분 혹은 바람에 기찻길 위에 올라서면 이상하게 설렌다.

기찻길을 넘어 소나무들 사이를 지나 들어선 등명 해변엔 강릉의 바다와 달리 아무도 없었다. 오직 바다, 하늘, 모래밭과 나, 그렇게 우리뿐이었다. 바람에 부딪혀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발이 빠졌다 나오는 사각 거리는 모래 소리만 들려오는 고요함이 좋았다.

등명 해변을 따라 달리는 기찻길

정동진 역은 겉보기에 작았지만 바로 앞에 해변이 있고 서울까지 한 번에 가는 열차가 있어서인지 평일인데도 역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탁 트인 역에서 보이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플랫폼과 들어오는 열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외국인 커플이 있었다.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 풍경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을 보니, 해외여행 중 기차를 탈 때마다 역사, 플랫폼, 열차 안팎을 연달아 촬영했던 내가 기억났다. 낯선 장소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특별해 보인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정동진 3번 플랫폼 옆 오래된 기찻길 위로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잠시 후 도착한 동해역은 정동진과는 달리 조용한 역사에 나만이 여행자처럼 보였다. 역에서 2시간 정도 거리의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역 주변의 작은 상점들을 지나가니 드론 비행 금지라는 눈에 띄게 커다란 표지판이 보였다. 그 뒤로 높은 철조망이 감싼 비밀스러운 장소가 보였다. 지방 길을 걷다 보면 의외의 장소에서 군사기지를 발견하게 된다. 여행 이튿날 강릉 시내에서 벗어나 소나무밭이 있던 언덕길을 걸어가던 중에도 작은 활주로가 있는 공군 기지를 만났었다. 차 타고 관광지들로 이동할 때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기찻길 옆 가을볕을 피할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내는 소나무가 즐비한 해파랑길을 걷다 보니 하얀 비행운 꼬리를 물고 연달아 날아가는 항공기들도 보였다.

해파랑길과 나란히 기차가 지나가고 그 너머에 바다가 보인다.

막 해가 넘어가 조금씩 어두워질 때쯤 숙소에 도착했다. 세탁기가 있는 숙소는 흔치 않아서 먼지와 땀범벅으로 찌든 옷들을 빨아서 여기저기 방 안에 널어놓고 나왔다. 강릉에서 먹은 햄버거 이후, 눈에 띄는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 삼각김밥으로 대충 허기를 때우다 보니 제대로 된 식사가 고팠다. 유명하다는 중식당으로 걸어가던 중 24시 콩나물국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 그려진 신선한 계란이 풀어진 뜨끈한 국물과 하얀 쌀밥이 나를 멈췄다.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갖다 주신 콩나물국밥은 5,500원이라는 가격이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푸짐했다. 뚝배기 속 콩나물국은 그동안 걸었던 거리만큼 쌓였던 피로를  모두 녹여버릴 정도로 뜨끈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관광지나 유명 맛집으로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 아닌 지방의 식당에서 느껴지는 친절은 서울 식당의 친절과는 다르다. 지방의 밥집은 옆집 아주머니, 아저씨가 배고픈 동네 이웃에게 밥 한 끼 차려주시는 따뜻함이라면, 서울은 서비스 훈련을 통해 길러진 일률적이고 규칙적인 각에 딱 들어맞는 사무적인 친절이라고나 할까? 아주머니의 따뜻한 미소는 경직된 여행자의 마음도 녹여주셨다.

여독을 녹여주었던 뜨끈한 콩나물 국밥

갑자기 올해 3월에 갔던 베트남 달랏의 쌀국숫집이 생각났다. 점심때가 훌쩍 넘은 시간 너무 허기가 져서 들어갔던 곳이었다. 출입문 없이 조리대와 식사 공간에 한눈에 보이는 식당이었는데 굵은 주름이 패인 삐쩍 마른 할머니가 혼자 앉아 계셨다. 너무 늦은 시간에 죄송스러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쌀국수 하나를 시켰더니 닭고기가 잔뜩 올려진 푸짐한 양의 쌀국수를 갖다 주셨다. 닭껍질을 좋아하지 않아서 닭고기를 하나씩 집어  두어 개쯤 떼어냈을 때였다. 할머니가 이가 다 빠져 앞니 서너 개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껍질 없이 살만 있는 닭고기가 잔뜩 담긴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시고 국자로 국수 위 껍질 붙은 닭고기를 덜어가셨다. 구글 지도에도 없는데 리뷰 따위를 신경 쓰신 것도, 그냥 봐도 관광객인 뜨내기손님이 빤한데 다시 오라고 친절을 베푸신 것도 아니고 순전히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매연으로 더욱 심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버렸었다. 이 좋은 식당을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따뜻한' 마음은 이렇게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의 피로를 녹여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던가?

논리적인 사고와 신속한 일처리를 통한 결과만이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회사에서 미팅은 핵심적인 내용만 논의하고 간결하게 끝내는 게 미덕이었다. 일대일로 업무 논의를 하다가 누군가 개인적인 애로사항을 풀어놓으면, 오죽했으면 별로 친하지 않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을까라며 공감하기는커녕 예의상 적당한 리액션을 하며 듣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왜 업무랑 관련도 없는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하지? 일할 시간 부족하지 않나? 왜 이렇게 여유롭지?'라고 험담하고 있었다.


엄마가 속상한 일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핵심만 얘기하면 되는데 관련도 없는 얘기를 왜 그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인지 답답했다.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하고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감정만 털어놓는 게 못마땅했다. 말로 꺼내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제나 걱정거리를 말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작 나 역시 낯선 누군가에게라도 이런 '따뜻함'을 받으면 가슴이 따스해져서 행복해지는 주제에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차갑게 굴었다. 감정을 경시하고 현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세상을 더 따뜻하게,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이들은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들이다.  

괜찮다가도 다시 면을 뚫고 올라오는 만성적인 우울은 나를 포함,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마음 깊은 곳에 감정을 가둬버린 시점에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녁 식사 후 산책하다가 발견한,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한섬 해변의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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