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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Jan 11. 2024

정동진

부주의: 조심을 하지 아니함.

새벽 6시 저절로 눈이 떠졌다. 회사에 다니는 며칠 전만 해도 눈을 뜨자마자 바로 '가기 싫다'라는 생각과 함께 8시쯤 일어나 부랴부랴 서둘러 나가곤 했었는데...

창 밖에선 아직 뜨지 않은 해가 바다와 하늘 사이에 틈을 만들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간, 낯선 풍경에서 오는 설렘은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숙소에서 바라봤던 해뜨기 전 동해 하늘과 바다

쌈싸름한 커피를 마시며 해가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잔잔히 출렁이는 바다, 떠오르는 태양에게 물들며 그대로 내어주는 남빛 하늘을 보면서 새삼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생각했다.


정동진까지 9시간이라는 대장정의 길이 남아있기 때문에 해가 완전히 올라오는 걸 보고 서둘러 배낭을 메고 해변 쪽을 향해 걸어갔다. 곧 청명한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한적한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사람에게 에너지를 준다.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바쁜 한여름을 보내고 한쪽에서 줄지어 쉬고 있는 구조대의 사다리 의자들

경포, 강문, 송정 해변... 강릉에 그저 경포 해변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달아 서로 붙어 있어도 각기 다른 이름 아래,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송정 해변 바로 옆 소나무 공원에는 산책하는 동네 어르신들 뿐 아니라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쳐가는 외국인 여행객이 있어서 왠지 이 긴 길을 무동력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것 같아 이상한 동료의식이 생겨 흐뭇했다.

그렇다고 짐가방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라 나는 금세 피곤해졌고 11시쯤 이미 배고파져 허기를 달랠 거리를 찾았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 뿐이었다. 영업을 했다 하더라도 여행지의 식당들은 나 홀로 여행객에게 친절치 못하여 2인 이상 먹을 수 있는 음식들 뿐이라 어차피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마땅치 않았다. 송정 해변을 벗어나 아파트들이 줄지은 도로로 나오니 새파란 하늘 아래 하얀 건물에 쓰인 번패티번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햄버거 가게가 분명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지만, 1인분을 시킬 수 있으며 고칼로리를 제공하는 나 홀로 배낭 여행객에 어울리는 메뉴였다.

이른 시간이라 조용한 매장에는 통창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배낭들을 내려놓아 가벼워진 몸 때문인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오너먼트가 잔뜩 달린 크리스마스트리의 반짝임 때문인지 갑자기 즐거워진 마음에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잔뜩 남겼다.

알고 보니 유명한 버거 체인이었던 번패티번 강릉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배낭여행객의 피로를 달래주었던 짭조름한 버거와 달달한 콜라의 단짠 조화

좀 더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2시간 넘게 걸었음에도 9시간 중 8시간 거리가 남았다는 믿기 어려운 현실을 보고 내 느린 걸음을 생각하여 식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왔다.


바닷가를 벗어나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 길은 바닷길과는 다른 목가적인 풍경을 보여주었다. 금세 입안에서 아삭아삭 소리를 낼 듯 속이 가득 찬 배추들이 촘촘히 들어선 배추밭, 서울에선 보기 힘든 조금은 삐뚤게 줄 서 있는 전봇대들, 그리고 늦가을의 누런 논 위에 후드득 떨어진 하얀 마쉬맬로우는 햄버거 점심 후에 딱 어울리는 달콤한 간식처럼 보여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수확철이 다가온 푸릇푸릇한 배추밭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마쉬맬로우가 떨어져 있는 논밭

오랜 세월이 그대로 배어있는 낡은 간판의 구멍가게가 있는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을 지나 길의 끝에 도달하니 차가 쌩쌩 지나가는 국도가 있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풍경에 긴장하며 가드레일에 몸을 붙여 조심스럽게 좁은 갓길을 걸었다. 머리 위로 나타난 고가 도로로 어두워진 갓길과 빠른 속도로 나를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들 때문에 긴장감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결국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아 왔던 길을 돌아 마을 어귀로 돌아갔다. 알아보니 20분쯤 후에 정동진 방향 버스가 온다 하여 마을에서 지나쳤던 오래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 안에 들어서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랐는지 의자 밑에 붙어있던 꼬마 뱀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풀밭으로 사라졌다. 꼬마 뱀의 시원한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여유롭게 버스를 기다리며 맞은편에 보이는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둘러봤더니 마을 방향으로 좀 더 내려가면 맞은편에 작은 버스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다. 눈에 띄는 버스 정류장만 보고 여기가 맞겠거니 하고 반대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걸었던 방향으로 버스가 지나간다는 당연한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한눈에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에만 집중하여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쳤다. 다음 버스는 2시간이 지나야 있다는 것을 보니 허탈한 마음에 스스로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다시 걸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국도 위 갓길에 대한 두려움에 결국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로 하고 내리쬐는 가을 햇빛을 가려주는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 앉아, 가을 농촌 풍경을 눈에 담았다.

 뜨거운 가을 햇빛을 가려줬던 오래된 버스 정류장과 여행을 함께 했던 배낭 2개

낡은 버스 안은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 외에는 장바구니 카트들과 무엇인가 담긴 가마니들을 손에 꼭 쥐고 앉아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가득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린 학생과 장에 다녀오시는 어르신들의 일상에 갑자기 올라탄 나의 여행자 행색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해안길을 지나 정동진 역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걸었다. 엄마가 가보고 싶어 했던 선박 모양의 호텔이었는데 비수기인 건지 가격이 많이 할인되어 예약했던 곳이었다. 배낭여행객은 오지 않는 유명 호텔이라 그런지,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도보가 사라져 차도를 걸어야 했지만 지나가는 차가 없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아침과는 또 다른 색으로 물든 해 질 녘의 하늘과 얼었던 몸을 녹여주는 호텔 로비의 온기, 그리고 곧 배낭을 내려놓고 쉴 수 있다는 기대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풀어졌던 마음은 움츠러들고 말았다. 체크인을 하려는데 투숙객 인원을 묻더니 1인은 예약 여부와 관계없이 체크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왜 1인은 투숙이 불가능한 건지 물었지만 그게 호텔 방침이라며 예약 시 1인은 투숙할 수 없다는 안내가 있었을 거라고 환불 절차를 알려주었다. 이러한 방침을 만든 책임자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피곤한 몸과 늦은 시간에 새로운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걱정으로 속상한 마음에 1인이 투숙한다고 설정하고 예약했는데 미리 연락을 주거나 1인 투숙으로 설정되었으면 예약할 수 없도록 막아야 하는 건 아닌지 물었다. 호텔 사이트로 직접 예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매우 사무적이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곧 체크인 거절당할 운명을 모른 채 즐겼던 풍경

내게 친절하지 않다고 현재 내가 처한 어려움에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기분이 상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다른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아직 방이 남아있는 근처 숙소를 찾았다. 가격은 좀 더 비쌌지만 그나마 가까운 숙소를 예약하고 2시간 여 어두운 차도를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택시를 불렀다. 가벼운 옷차림의 투숙객들이 배낭을 앞뒤로 짊어진 두껍게 몸을 감싼 내 옆을 지나갔다. 그들의 행복하고 여유로운 얼굴들은 피로가 가득한 긴장한 나의 모습과 대조되며 이 공간에서 나는 다시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외로웠다.


버스를 놓친 것도, 호텔에서 거절당한 것도 그 이유는 명백한 나의 부주의였다. 어젯밤 예약할 때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고, 한 번 더 생각하여 버스 방향을 고려했었어야 했다. 그저 예쁜 사진과 할인된 가격에, 정류장의 편안한 의자에 현혹되어 중요한 부분들을 놓친 것이었다.


부주의로 이렇게 안 좋은 결과가 도래해도 '내 성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라고 어리석은 자기 합리화를 했었다. MBTI가 P라서 그런 거라고,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디테일을 놓쳐 놓고선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쪽이라 그렇다며 뻔뻔하게 굴었다. 세심하고 꼼꼼한 사람들을 보며 큰 그림보지 못한다고 평가하며, 별일 아닌 일에 예민하다고 생각다.

얼마나 오만했던 건가?

약점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완화하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지속적인 자기 합리화로 열심히 방어벽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부주의로 계속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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