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잘난 체하고 뽐내고 건방짐.
도로 중간에 좌회전하여 들어가 작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해산물을 싣고 있는 탑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방금 어획을 하고 돌아온 배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 스페이스 미조는 문화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천천히 차를 몰고 가니 우측 큰 건물 1층 작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제대로 찾아온 건지 의심이 들었지만 건물 뒤쪽 입구로 들어간 순간, 통유리 창문에 노출 콘크리트와 철근이 드러난 건물과 예술적 감각이 스며있는 입구로 가는 길 덕분에 의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입장권을 사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입구 옆에 있는 카페에 가서 물어보니 무료관람이란 말에 송구하여 이따가 음료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민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보관하던 오래된 냉동창고 건물을 지역활성화를 위해 아름다운 문화시설로 바꾸었는데 냉큼 구경만 하고 가기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조항 앞바다에 철판을 담았다가 꺼내는 작업을 통해 파도의 흔적을 담으려 했다는 작품은 내게는 민둥산에서 본 억새밭 같았다. 내가 보지 못한 민둥산의 밤하늘 아래 바람에 휘부끼는 억새는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뒤로한 채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사진 하나와 사진작가라고 하기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루시드 폴이 직접 찍은 '10 years ago'라는 사진 속에는 석양빛을 받으며 춤추는 억새들이 있었다. 10년 전 여행에서 기억에 남았던 건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우연히 발견한 자연의 일부였다는 기록과 함께.
2층 통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내리비치는 빛은 창틀을 그림자로 콘크리트 벽에 시시각각 움직이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림자 속 우연히 보이는 무지갯빛을 발견하고는 운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며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미로 같은 건물을 탐색하다가 바깥 옥상으로 통하는 문 밖으로 나갔다. 부러 녹을 슬게 한 난해한 설치물과 화려한 벽화를 지나쳐 항구가 보이는 건물 앞쪽으로 돌아갔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이제 막 항구로 들어오는 배 위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어민들, 경외심이 들 정도로 자로 잰 듯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 앞머리 길이를 맞춰 정박되어 있는 선박들, 바다에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무지개색 방둑은 분주하면서도 잔잔하여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구석구석 스페이스 미조 탐험을 마치고 1층으로 돌아가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미처 보지 못한 카페 맞은편 공간으로 넘어가니 플로깅 키트 등 다양한 친환경 상품과 미조에서 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쓰던 버려진 어상자를 겹쳐 만든 테이블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업싸이클링한 플라스틱으로 바테이블을 만든 카페와 함께 스페이스 미조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라 설리스카이워크로 향했다.
겨울이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설리스카이워크는 무료 개방 중이었다. 아까 스페이스 미조에서 발견한 작은 무지개가 벌써부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바람이 몰아치는 계단을 올라가니 코끝과 귀가 시렸다. 큰 기대 없이 남해 유명 관광지라고 해서 들른 설리스카이워크의 석양은 해무와 함께 절경을 드러냈다. 바닥의 일부는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푸르른 나무숲 바로 앞 절벽아래 출렁이는 파도가 보였다. 주저 없이 뛰어내려 번지점프 스태프에게 'Nice jump!'라는 말도 들었던 나였지만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에 살짝 아찔하여 몸이 움추러들었다. 스카이워크의 끝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가 바다를 향해 매달려 있었지만 겨울바람 때문에 위험해서인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그네 뒤에서 해무가 가득한 바다 넘어 섬들을 바라보았다.
구름으로 뜨거운 해를 살짝 가린 하늘,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를 비추는 바다, 파도가 물결치며 만들어내는 금빛 물비늘들, 해무 사이로 살짝 드러난 남해의 작은 섬들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미경을 보여주었다. 조용히 바다를 가르며 육지로 돌아오는 작은 어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저 어선에 몸을 실은 어부는 매일 이런 풍광을 눈에 담으며 피곤한 몸을 누일 집으로 돌아가겠구나.
어두운 밤에 꼬불꼬불한 길을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 서둘러 새롭게 옮긴 숙소로 갔다. 주인장 아저씨는 어획을 하시다가 이제 취미로 낚시를 하시며 여행객을 위한 숙소를 운영한다고 하셨다. 투박한 외모와 달리 숙소 곳곳에는 아저씨의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짐만 내려놓고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가보고 싶었던 상주장커피로 갔다. 주차장 맞은편 작은 내천 앞에 있는 화려한 조명이 달린 카페와 달리, 상주장은 아주 오래된 여관과 젊은 느낌의 게스트하우스가 공존하는 골목길 속 넓은 마당이 있는 집 입구에 목재 입간판을 무심한 듯 세워두고 상주장커피라고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카페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3층 건물 옆 1층짜리 작은 공간에서 주인장이 커피를 만들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1시간 후 영업종료라 그런지 손님은 나 혼자 뿐이었다. 공간을 독차지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는데 인상 좋은 직원은 커피와 함께 자두 꽃을 닮은 양갱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환한 직원의 미소와 생각지도 못한 예쁜 간식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숙소로 돌아왔다. 서쪽으로 향한 창으로 보이는 석양은 설리스카이워크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주인아저씨의 낚싯배가 있는 방둑 뒤 바다는 빛나는 태양을 그대로 비추며 붉은빛을 내고 양떼구름은 아직은 파란 하늘을 보여주었다. 낮에 잡은 난생처음 듣는 달갱이 회를 나눠주신 아저씨 덕분에 누룽지뿐이었던 부실한 저녁이 풍부해졌다. 쫄깃한 맛이 어찌나 좋던지 후루룩 금세 접시를 비우고 말았다.
다음날 남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대국산성에 들렀다. 꾸불꾸불한 좁은 숲길은 작은 차 하나로도 비좁았다. 혹여나 내려오는 차가 있을까 봐 긴장했지만 다행히 나 혼자 뿐이었다. 내비가 도착지라고 알려주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평지 안쪽으로 차를 바짝 붙여 주차하고 마지막 구간은 걸어 올라갔다. 산성 한쪽이 무너져 위험하니 입장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냥 돌아가기에는 왔던 길이 너무 아까워 무너진 성벽은 반대쪽이니까 괜찮을 거라는 핑계를 대며 그대로 산성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산성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남해 여행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산들바람이 불어 잔잔한 바다는 구름 없는 하늘과 하나가 되어 어우러졌다.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 시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 높은 산에 커다란 돌들을 옮겼을지 경이로웠다.
남해가 좋다는 말을 무시하고 어차피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와 비슷하겠거니 건방진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해무와 어우러진 작은 섬들 덕분에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남해는 주민들의 친절함까지 더해져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이 되었다. 나는 이미 제주를 잊고 남해에 반해버렸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주 작은 정보만 제공하는 겉모습만 보고 제멋대로 가정하고 쉽게 판단하며 다 안다는 듯이 교만을 부린 것이 단지 이 번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셀 수 없이 건방지게 교만을 부렸을 것이다.
누군가의 성공을 보면서 그저 드러난 모습만 보고 좋겠다며 부러워하며 쉽게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견디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베트남에서 작은 사업체의 대표로 일하는 친구를 방문했을 때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업무 방식도,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느린 속도도 낯설었다. 빠른 속도로 일을 진행하는 기업 문화에 익숙했던지라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가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언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간섭하였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아무것도 없는 처음부터 시작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6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떻게 그 길을 헤쳐왔는지, 그곳은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체하며 훈수를 두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벚꽃 피는 봄이 되면 부모님을 모시고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담고 남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