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몇 년 전 엄마가 남해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제주를 좋아해서 코로나로 재택근무할 때 한달살이, 2 주살이, 그 외 여러 번의 여행을 했던 나는 제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남해에 가보고 싶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제주나 남해나 비슷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제주는 바다뿐만 아니라 한라산이 있고 넓어서 여러 번 가도 못가 본 곳이 너무 많았다. 남해가 좋다며 사람들이 여행 갈 때도 남해에 갈 바엔 그냥 제주도 가는 게 낫지 않나 하며 남해에 딱히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남쪽으로 내려온 김에 남해에 가보기로 했다.
남해에서 2박을 계획했고 대중교통도 불편해 보여서 미리 쏘카에서 차를 렌트했다. 네이버가 알려준 버스 도착 예상 시간이 지나치게 여유로워 남해대교를 건너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렌트한 차 이용 시간까지 아직 2시간여 남았다.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옆 공용주차장에 차가 있었기 때문에 터미널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커다란 리본들이 매달려 있고 바로 옆에 귀여운 회색 토끼가 산타할아버지 대신 빨간색 선물 주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테이블 사이 스툴에 혼자 앉은 갈색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왠지 피곤해 보였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 덕분에 더 따뜻한 공간이었다. 하얀 크림이 담긴 시그니처 커피를 시켜 당분을 섭취하며 아이패드를 꺼내 퇴화하는 기억을 되살리며 그동안 밀린 여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버스터미널 옆 공용주차장으로 가서 렌트한 차를 찾았다. 마침 귀여운 외모의 캐스퍼가 있었고 예전부터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비에 숙소 주소를 입력하고 이번 여행 동안 줄곧 들었던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작고 귀여운 녀석과 길을 나섰다. 파란 하늘과 차유리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빛 덕분에 잠시 앞 날에 대한 무거운 고민은 잊어버리고 해외여행을 온 것처럼 설레었다. 숙소로 가는 길은 멋진 풍경이 계속 따라왔지만 꾸불꾸불한 길 때문에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해가 질 때쯤 숙소에 도착했다. 언덕을 올라 숙소에 도착하니 따뜻한 방 안 작은 테이블 위에 피크닉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궁금해하며 안을 들여다보니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담겨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은 주방을 오렌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따뜻한 커피를 갖고 발코니로 나갔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남해의 해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부시게 뜨거운 빛을 뿜어내었다.
다음날 가장 가까운 다랭이마을 전망대를 찾았다. 바래진 초록빛의 다랭이 밭 풍경은 조금 아쉬웠지만 3월에 갔던 베트남 사파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사파의 다랭이 밭을 보며 독특한 광경에 감탄했었는데 한국에도 다랭이 밭이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바람도 거의 없는 잔잔한 바다 위 태양이 내리쬐는 망망대해로 향해 가는 작은 선박들 외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하얗게 빛을 내는 남해를 뒤로 하고 남해 독일마을로 향했다. 남해길은 바다를 따라 놓여 있어 고개를 돌리면 아름다운 바다가 햇빛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운전하면서 한눈팔기 십상이다. 그러나 산 위에 놓인 길은 꾸불꾸불하여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큰일이다. 마치 지금 막 요리된 맛있는 요리가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는데도 먹을 수는 없는 기분이랄까.
평평한 직진 도로가 나타나 결국 작은 마을 앞 길가에 주차하고 길을 건너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썰물로 갯벌이 드러난 바다는 산 길에서 살짝 보였던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로 다시 길을 나섰다.
독일마을은 오르막길 양쪽에 예쁜 집들이 줄지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꼭대기 파독전시관 옆 주차장에 차를 두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3개 갈래길 중 아무도 가지 않는 작은 정원길로 들어섰다. 집 뒤 쪽 나무들이 많은 조용한 길이었다. 조금 걸으니 어느덧 길의 끝이라 상점들이 있는 중심가로 다시 언덕길을 되돌아갔다. 작은 정원길은 가로수와 집들의 정원 덕분에 조용한 마을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는데 중심가는 뒤돌면 바다가 보이고 길거리는 독일 느낌이 가득했다. 멋진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걸 바라보며 왜 독일에서 돌아온 분들이 여기를 독일마을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문을 닫은 식당과 상점들이 많았다. 가보고 싶었던 식당은 문을 닫아서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주차장과 가까운 레스토랑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60대로 보이는 인상 좋은 분이 계셨다. 가정식 같아 보이는 간단한 점심과 커피가 나와 맛을 보며 주인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은 독일에 가신 적은 없고 고모님이 독일에 계시는데 딸이 한국에 왔다가 한국 정부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어 어머니를 설득하여 남해에 땅을 구매하여 투자하시고 레스토랑을 짓고 조카분이 내려와 식당을 운영하고 계신 것이었다. 정말 독일에 사셨던 분들이 돌아와 거주하시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재 대부분 식당, 상점 혹은 펜션으로 운영되고 실제 거주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독일마을과 달리 민속촌처럼 조성된 작은 테마파크인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차에 몸을 싣고 미조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