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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Mar 07. 2024

통영

존엄: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숭고한 것을 지키는 것"

구룡포를 벗어나 포항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통영행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혹시 자리가 없지 않을까라고 어리석은 걱정과 달리 남은 좌석이 많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어느덧 어둠이 한가득 내려왔다. 잠결에 어리둥절할 때 버스는 시내로 진입하여 곧 통영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근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로 배를 채우고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작은 스크린에 뜨는 버스 정보와 네이버 지도가 알려주는 정보의 차이로 기다리는 버스가 오긴 하는 건지, 언제 오는 건지 염려가 되어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그리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어두운 길을 걷다 보니 몇 년 전 부모님과 함께 왔던 통영이 떠올려지는 장소가 나타났다. 바다 옆 북적이던 상점들은 이미 어두워졌고 몇몇의 가게들만 꿀빵을 팔고 있었다. 바닷가를 벗어나 들어선 길엔 외국어들이 쓰인 상점들이 많아지고 갑자기 휘황찬란한 술집, 노래방, 모텔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숙소 위치를 잘못 선택한 건 아닌지 불안했지만 달리 갈 데도 없는지라 예약한 모텔로 들어갔다. 방 안의 따스함은 늘 그렇듯이 긴장을 풀어버리고 나는 바로 잠에 들었다. 

지난번 부모님과 내려오던 날, 차가 너무 막혀서 8시간 걸려 통영에 도착했었다. 결국 우리는 통영을 거의 둘러보지도 못하고 다음날 여수로 넘어갔던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조용히 산책도 할 겸 근처에 있는 이순신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모텔 밖 거리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치안이 괜찮을까 걱정했던 어제의 내가 우스웠다. 지도를 따라 걷는데, 지도는 풍경이 예쁜 길이 아닌 빠른 길을 알려주어서 내가 따라가는 길은 항구 뒤쪽 길, 줄줄이 주차된 차들과 오래된 건물의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이색적이라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녹이 슨 물건들이 소중한 물건인양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물 앞에는 건설 폐기물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항구 쪽 길의 빛깔이 파랑이라면 이 뒤쪽 길은 황토색 같았다. 새로운 풍경에 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검은 자전거를 타고 오시는 머리가 희끗하신 아저씨의 모습과 어우러져 마치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녹이 슨 철물과 오래된 나무판자들이 정리되어 있던 오래된 철물점

길의 끝에는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잘 정리된 카페가 있었다. 나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마치고 현재로 돌아왔다. 카페 맞은편 주차장으로 들어서 뒤돌아보니 뻥 뚫린 하늘 아래 파란 바다 너머 겹겹이 들어선 섬들이 나타났다. 기분 좋아지는 풍경을 뒤로하고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귀여운 고양이 두 녀석이 햇살 샤워를 하고 있었다. 노란 고양이는 내가 지나가든 말든 신경 끄고 식빵을 굽고 있었고 검은 고양이는 왠 놈이 지나가는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 가을과 봄의 빛깔로 물든 가로수들이 있었고 오르막 길 꼭대기에선 새파란 하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하늘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아침이었다. 

푸르른 풍경에 내 눈도 깨끗해지는 느낌
공원 주차장에서 만난 뜻밖의 사랑스러운 주인장들
가을색과 봄의 색이 하늘과 어울려 예뼜던 이순신 공원으로 향한 언덕길

언덕 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을 펼쳤던 방향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앞에는 32전 32 승전도와 한산대첩이 기록되어 있는데 경외심이 절로 생기는 곳이었다. 파란 바다 위에 하얀 양식장 부표들이 떠 있고 바다를 따라 산책로가 있었으며, 그 뒤편의 봉긋한 언덕은 나무로 덮여 초록빛을 내고 바다를 떠다니는 선박들은 하얀 파도 꼬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마저 편안하여 벤치에 앉아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남해를 계속 지켜보시고 계시는 듯한...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없었던 이순신 공원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공원 산책로를 걷다가 동피랑 마을로 향했다. 동피랑 마을은 아니나 다를까 입구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로같이 얽히고설킨 골목길들 사이로 예쁜 벽화들이 제각각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백꽃이 가득 핀 벽을 지나 어린 왕자를 만나고 알록달록 갈매기들이 벽 위에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집을 만났다. 오래된 집을 개조한 카페와 길의 경계가 흐릿한 곳을 지나 올라가면 어느덧 동포루에 도착한다. 가을빛으로 물든 남망산은 항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주었지만, 과거 바닷길을 가려 적군의 동정을 살피기 어렵게 만들었을 성싶었다. 다른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오니 이번엔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와 하늘을 나는 돌고래를 만나고 그리스 산토리니가 연상되는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채워진 골목길을 지났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집은 길 옆 작은 계단 위 폐가였다. 계단을 오르면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맞은편 계단을 조금만 더 오르면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집에 들어서면 왼쪽 아궁이 위에 밤하늘이 채워져 있고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하얀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이 나를 마주 보고 있다. 작가는 우주선과 우주인으로 공간을 채웠다. 부엌의 어두운 밤하늘과 우주인을 지나가면 바닥엔 초록빛 이끼와 벽은 넝쿨로 가득 차고 천장의 대부분이 하늘로 뚫려 빛이 들어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벽화 마을, 동피랑 마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오리를 닮은 귀여운 갈매기들
버려진 낡은 집은 벽화로 예술작품이 되어 다시 살아났다

벽화로 다시 살아난 작은 마을을 떠나, 해가 지기 전 서둘러 서피랑을 찾아갔다. 관광객들이 가득했던 동피랑과 달리 서피랑은 너무 조용해서 행여나 내가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조용한 마을에 작은 벽화들이 숨바꼭질하듯이 '나를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동피랑의 화려함보다 서피랑의 수수께끼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해가 지는 작은 터널로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업은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엄마를 바라보고 엄마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아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랗게 물든 구름과 끝까지 빛을 내며 지고 있는 해를 등지고 걷는 다정한 모녀가 사랑스러워서 순간 마음이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서피랑으로 오르는 길 해가 지는 시간 사랑스러운 모녀를 만났던 작은 터널
서피랑으로 오르는 길, 해를 받아 울타리 그림자가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길을 오르다가 그림이 그려진 계단들을 발견했다. 블로그에서 얼핏 봤던 계단이란 것을 깨닫고 내가 길을 돌아온 것을 깨달았지만 그대로 그냥 좋았다. 서쪽 산 뒤로 조금씩 모습을 감추는 해는 서피랑 정상을 붉게 물들였다. 빨간 등대는 더욱 붉게 물들고 정상에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차가워졌지만 길을 돌아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들 덕분에 아름다운 구조물처럼 보였던 계단과 구조물들
붉게 물든 서피랑 정상

벽화를 구경하며 찬찬히 계단길로 들어서니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 위에 박경리 작가님의 말씀이 적혀있었다.

 

"존엄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가장 숭고한 것을 지키는 것"


나는 항상 신념이 있는 사람을 존경했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그곳에 그 굳건한 믿음이 스며들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는 사람.

이순신 장군처럼 위인이 아니더라도 나와 비슷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신념이 없는 나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쉽게 바뀌는 사람이다. 나에게 가장 숭고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으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축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존엄과는 너무 멀리 서 있는 사람이다. 

떨어진 은행잎이 서피랑의 벽화처럼 바닥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세찬 바람에 펄럭이던 서포루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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