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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Feb 08. 2024

포항 3편

중독: 해로운 결과를 초래해도 조절하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사용하는 현상

바닷가 앞에서 맞이한 포항의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만큼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오랜만에 핫팩을 하나 꺼내고 숙소와 바다 사이의 뻥 뚫린 해안길을 걸었다. 이른 시간 지나가는 차 없이 아스팔트 위를 맘 편하게 걸었다. 길 위엔 세찬 바람에 떠밀려 온 바닷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겨울바람은 내 얼굴을 세차게 때리면서도 하얀 파도를 만들어 고요함을 밀어내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깨끗한 공기로 씻겨진 풍경 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바람에 밀려 아스팔트 길까지 밀려온 바닷물 

한 시간여 걸으니 멀리 바닷물 속에 서 있는 푸른빛의 손이 보였다. 혼자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춥고 쓸쓸해 보였다. 한파가 몰아친 호미곶의 평일은 매우 한가해 보였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등대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간 박물관 정면의 통창을 통해 비치는 풍경은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예술 작품처럼 멋스러웠다. 등대에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비치된 작은 도서관이 더해져 좀 더 머물고 싶은 곳이었지만 떠나면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붙잡기 위해 아쉬운 마음을 거두고 서둘러 나왔다. 

호미곶을 상징하는 바닷속에서 뻗은 손
창 밖 풍경이 바닥에 반사되어 하나의 작품 같았다

그 유명한 구룡포에 가기 전에 잠시 들르고 싶은 작은 어촌이 있었다. 정말 재미있게 본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이었는데 마침 구룡포의 세네 정거장 전에 내리면 마을로 갈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빠르게 달리는 빨간 버스 안, 내 몸은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혹시라도 정거장을 놓칠까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다가 기사아저씨가 지나칠세라 잽싸게 벨을 눌렀다. 드라마 속에선 사람들로 가득 차 떠들썩하던 마을은 주민들이 함께 어딘가로 나들이라도 간 것처럼 고요했다. 바다를 향해 창을 낸 알록달록한 집들이 언덕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조용한 산책을 끝내고 바다를 따라 구룡포로 길을 나섰다. 

빨간 등대 앞에서 본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
낡은 배를 덮은 노란색 페인트, 색색별 바구니와 초록색 그물, 그리고 빨간 등대와 파란 하늘. 한눈에 담기는 다채로움. 

헉헉거리며 마을 오르막길을 열심히 뛰었지만 바로 앞으로 익숙한 빨간 버스가 휙 지나가 버렸다. 허탈한 마음으로 주저하다가,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보기로 했다. 찬바람 속에서도 샛노란 꽃을 예쁘게 피워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내어놓은 자상한 주인장의 집을 지나 갈대가 잔뜩 키 작은 천을 지나니 작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이차 도로가 나타났다. 금세 피곤해진 난 계속 걸어갈 자신이 없어 결국 정류장 의자에 앉아 햇빛을 담뿍 받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맞은편 건물 앞에 줄지어 자라는 작은 나무들이 바람에 살살 흔들렸다. 마음이 편안해져 목적지 없이 이대로 계속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버스정류장이 있던 한적했던 이차선 도로

구룡포에서 내리는 승객은 나뿐이었다. 일부 도로를 공사하고 있어서 내리자마자 쫓기듯이 정거장을 벗어났다. 눈에 아주 익숙한 일본인 가옥거리의 입구와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오르기 전, 양쪽 거리의 상점들이 아기자기하여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창문 앞에 예쁜 사진들과 작은 꽃이 붙은 카페는 일제강점기 당시 본래의 모습의 사진도 붙어있었는데 예전 그대로라서 놀랐다. 좀 더 걸으니 여행자들을 위한 피어라운지라는 쉼터가 있었다. 정말 고맙게도 무료 락커가 있어서 무거운 배낭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훨씬 가벼워진 걸음으로 신나게 둘러보다 보니 또다시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동백이의 일터, 까멜리아는 겉으로 보기엔 작아 보였지만 안에 들어서니 테마파크 마냥 지도까지 갖춘 다양한 테마를 가진 동백왕국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를 '동백 씨'라고 살갑게 부르는 소리에 미소를 지었지만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워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커피와 동백샌드 하나를 받아 신발을 벗고 좁은 나무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카페라기보다는 테마파크 같았던 까멜리아

커피를 들고 아무도 없는 이층을 내 집 마냥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천장이 낮은 이층은 오래된 나무 통창을 통해 해가 깊숙이 들어와 다다미와 소반들 위에 창 모양 그대로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따뜻한 햇빛 아래, 창가 옆에서 동백꽃이 그려진 쿠션 하나 베고 누워 따뜻한 햇살 받으며 낮잠에 들고 싶은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1층으로 내려와 뒷문으로 나가 용식이 서재로 건너갔다. 한쪽 벽 책장에 책이 가득하고 통창으로 해가 듬뿍 들어와 잠시 벽에 기대어 조용히 책을 읽으며 쉬고 싶었지만 먼저 온 커플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기분이 들러 금세 그곳을 빠져나왔다. 테마파크 같았던 까멜리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떠날 때 즈음 어느덧 카페 1층은 손님들로 가득 차 떠들썩해졌다.  

동백타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간, 용식이 서재, 용식이가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진 않았는데...
바닥의 하얀 돌조각들이 빛을 받아 따뜻하고 밝았던 옥상은 그리스 도시가 연상되었다

일본인 가옥거리 중앙 계단을 올라 충혼각 앞에서 일본인들에게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였다던 구룡포를 바라보았다. 작은 항에 줄 맞춰 띄어진 선박들 뒤로 바다가 햇빛을 받아 물비늘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인데도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벽화가 그려진 마을을 둘러보고 통영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포항 시내로 향했다. 

조용한 어촌 석병리의 빨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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