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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Feb 01. 2024

포항 1편

중독: 해로운 결과를 초래해도 조절하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사용하는 현상

도착했던 날처럼 떠나는 날에도 제천에는 비가 내렸다. 제천역에 가기 전 우체국에 들러 따뜻한 남쪽 기후에 불필요한 내복과 핫팩들을 집으로 보냈다. 울릉도로 가는 길목인 데다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마다 등장했던 포항 역시 이번 여행 중 필히 가려던 곳 중 하나였다. 제천에서 포항으로 가려면 한번 기차를 갈아타야 했는데 이름은 생소하지만 대기 시간이 가장 짧은 오송역을 지나가기로 했다. 낯선 이름으로 조용하고 작은 역일 거라고 생각했던 오송역은 서울역만큼 크고 복잡했다. 새것의 티가 절절 흐르는 대형 푸드코트와 다양한 프랜차이즈들 뿐 아니라 약국까지 있어서 감기기운을 달래기 위해 감기약을 샀다. 포항행 기차가 곧 올 시간에 급하게 김밥 하나와 어묵을 샀는데 가격에 깜짝 놀랐다. 여행을 하면서 저렴한 밥값에 익숙해졌던지라 프랜차이즈의 깔끔하게 포장된 작은 김밥 한 줄과 일회용 컵에 담긴 어묵 두 개가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이제 분식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이 비싸진 분식

3시쯤 도착한 포항은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어 쌀쌀한 강원도 산속에서 소중했던 패딩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숙소로 가기 전, 기차역에 붙은 울릉도 선박 할인 광고에 선박회사에 전화를 했다. 포항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겨울옷이 버거울 정도로 기온이 높은데 풍랑 때문에 출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울릉도 숙소에 전화하니 자주 있는 일인지 취소하는 방법을 안내해 주셨다. 그다음 날로 예약했던 포항 숙소 역시 방이 있다고 날짜를 바꿔주셨다. 그다음 날은 제발 울릉도로 가는 배가 바다에 뜰 수 있기를 기도하며 시내버스에 올랐다. 포항버스터미널 근처 숙소에 도착했지만 아직 체크인까지 1시간 정도 남아 짐만 맡기고 근처를 돌아다닐 계획이었는데 친절한 주인아저씨는 일찍 방을 내주셨다. 울릉도라는 변수가 생겼지만 포항 사람들의 따뜻한 친절과 방의 온도에 긴장이 풀어져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죽도시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사람들이 꽤 많아서 앞뒤로 멘 배낭들을 편히 내려놓기 어려웠다. 시장은 나와 같은 관광객들과 현지 손님들, 상인들로 활기찼다. 맛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무엇을 사도 나에겐 결국 무거운 배낭에 더해지는 짐들이 될 것이라 대충 구경하고 백반집 골목으로 향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테이블 서너 개 들어가는 아주 작은 가게들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행히 의자가 하나밖에 없는 구석자리가 나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밥이 나오기 전 나온 탁한 빛깔의 숭늉은 구수하고 따뜻했다. 숭늉을 비우기 전 은쟁반에 오랜만에 보는 보리밥,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 작은 생선구이 그리고 나물들이 가지런히 담겨 나왔다. 새삼 전날 먹었던 김밥이 떠올라 밥맛이 더 좋았다. 

평일인데도 북적이던 죽도시장
생선구이도 나왔던 저렴한 보리 비빔밥

 버스를 타고 작은 건물들 틈을 걸으며 숙소를 찾으러 들어선 골목길 사이, 푸른 하늘 아래 새빨간 LOVE 조형물 앞에 까만 자전거, 그 뒤로 바다가 있었다. 숙소에 짐을 맡기려고 줄을 섰는데 서둘러 밖으로 나와 그 시간의 아름다운 포항을 눈에 담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푸른 하늘, 빨간 LOVE, 까만 자전거, 초록 소나무, 하얀 갈매기 그리고 모래사장과 파란 바다

죽도시장과 달리 영일대 해수욕장은 좀 더 한적했다. 인적 없는 영일대로 걸어가며 평일이라 관광객이 별로 없나 싶을 때, 큰 소리로 웃으며 농담하시는 중년 동창생들을 지나갔다. 여행의 즐거움이 흘러나와 보기 좋았다. 조용히 영일대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포스코 왕국답게 멀리 거대한 제철소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은 따스했지만 시내와 달리 바닷바람은 매서워 금세 내려왔다. 방파제를 끼고 곡선으로 휘어진 해안로는 눈까지 즐거워지는 산책길이었다. 

종종 산책하는 사람들이 지나갈 뿐 한적하지만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

멋진 풍경 덕분에 한껏 올라간 기분으로 해상스카이워크를 향해 걸었다. 해가 기울수록 더욱더 사나워지는 바람에 감기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지칠 때쯤 해상스카이워크가 나타났다. 바다 위에 있는 구불구불한 길에 실망하고 말았다. 하늘에서 드론으로 촬영했다면 남빛 바다 위에 곡선으로 휘어지는 길이 아름답게 보였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구불구불한 다리 같았다. 얼굴을 마구 때리는 해풍 때문에 그마저도 조금 걷다가 서둘러 내려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해안로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지만 조금 전만큼 나를 설레게 하지 않았다. 흥미와 반비례하는 익숙함이야말로 사람의 간사함을 만드는 못된 녀석이다. 

지도는 환호공원을 가로질러 스페이스워크로 가라고 하는데 해안로에서는 언덕만 보이고 올라가는 길이 명확하지 않아서 지도를 믿어야 할지 의심스러웠다. 결국 환호공원으로 우선 가야겠다 싶어서 찾아 가는데 골목길을 지나 아파트를 지나가는 것이 왠지 돌아가는 것 같아 미심쩍었다. 사람 한 명 안 보이는 골목길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해상스카이워크가 생각나 꼭 가야 하나 싶은 마음에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다시 해안 산책로로 돌아가기에는 왔던 길이 아까웠다. 공원 안에 들어서니 드디어 스카이워크로 가는 안내 표지가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강풍으로 입장할 수 없다고 했다. 울릉도를 시작으로 거센 바닷바람이 나를 밀쳐내는 기분이 들었지만, 스카이워크 구경이라도 해야겠단 마음에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 위에 롤러코스터처럼 휘어진 길은 서쪽으로 지는 해의 빛을 받아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나처럼 아쉬운 마음에 올라온 관광객들 역시 스카이워크와 석조를 배경으로 사진으로나마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차가운 해풍 속에서도 한참 스페이스워크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조금 실망스러웠던 해상스카이워크
석조와 함께 어우러져 작품 같았던 스페이스워크
숙소로 돌아오는 길 석양이 지던 영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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