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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Feb 05. 2024

포항 2편

중독: 해로운 결과를 초래해도 조절하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사용하는 현상

다음날 역시 울릉도는 쉬이 길을 내어주지 않았고 겨울바람은 세찼다. 하루만 더 기다려보고 바닷길이 열리지 않으면 날씨 좋은 봄날에 다시 올 작정으로 호미곶으로 향했다. 그동안 줄곧 국밥 혹은 사발면과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평소에는 거의 먹지도 않는 샌드위치가 고팠다. 호미곶으로 출발하기 전 바다를 마주 보며 좀 더 건강한 맛의 아침을 즐겼다.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인 줄 알았는데 프랜차이즈 카페였던 읍천리 382

죽도시장으로 가는 어제의 북적함은 찾아볼 수 없는 침울할 정도로 조용한 아침 버스를 타고 종점역에 내렸다. 시골집 앞에 작은 버스정류장만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갈아탈 버스가 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미곶까지 걸어갈 마음으로 한적한 마을을 걷기 시작했다. 지붕이 낮은 시골집들과 작은 가게들이 있어 아기자기한 매력에 끌려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마트와 작은 건물 사잇길에 들어서니 노랑 파랑의 예쁜 건물을 배경으로 나무 몇 그루와 작은 정원이 나타났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왠지 모르게 어여쁘다. 조그마한 정원에는 아직 잎이 가득한 샛노란 은행나무와 검정돌로 만든 길 그리고 작은 경로당이 있었다. 그 뒤로 오래전에 건축된 듯이 보이지만 퍼런 페인트가 깔끔하게 칠해져 역사를 알기 어려운 빌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풍경이 가득한 마을을 지나니 Healing Beach라고 쓰인 도구해수욕장이 등장했다. 모래 위 야자수들과 주차된 하얀 카라반들의 이색적인 모습에 회색빛 겨울 바다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마치 남태평양 따뜻한 나라로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새것인 듯 오래된 듯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맨션
겨울바다에서도 야자수는 참 푸르르다

바다를 따라 소나무길을 지나 어촌을 구경하며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다. 길 앞에 갑자기 철조망 문과 함께 빨간색 배경에 노란색 글씨의 경고문이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는 군사지역 경고문이라서 들어가도 되는지 당혹스러웠다. 가까이 다가서니 입구 옆에 붙은 작은 화살표가 둘레길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길래 낙엽이 떨어진 아스팔트 길로 발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 군사지역이었는데 바뀐 것인지 모르겠으나 둘레길을 걷는 여행자에게는 너무나 혼란을 주는 곳이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었던 철조망과 경고문

언덕길을 다 올라가니 귀비고 박물관과 새로 만든 것처럼 깨끗한 초가집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것 같은 초가집이라니, 오늘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날인 듯하다. 내려다보는 하얀 물결을 계속 만들어내는 바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배낭 두 개와 함께 하는 걸음은 너무 무거워 귀비고 박물관에선 잠시 의자에 앉아 추위만 달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맞은편 언덕 위에 띄엄띄엄 모텔과 카페만 눈에 보이는 쌀쌀한 아스팔트길을 혼자 걷는 것은 한적해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로 인한 무서움은 없었지만 몸은 더욱 무겁게 느껴졌고 마음은 차가워졌다. 길의 끝에 나타난 작은 마을로 들어가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버스를 타지 않으면 오늘 밤은 야외에서 잠을 청해야 할 듯싶었다. 결국 호미곶 근처도 미치지 못한 나를 보며 호미곶을 들러 호미곶과 구룡포 사이 어딘가에 있는 숙소에 걸어갈 야심 찬 생각을 했던 내가 우스웠다. 다행히 구룡포행 버스는 아직 있었고 15분쯤 후에 도착한다는 안내에 맞은편 마트에 들어가 후다닥 저녁에 먹을 간단한 음식을 샀다. 빨간 버스를 타고 지도가 알려준 숙소와 가까운 정류장에 내렸는데 국도 한복판이다. 또다시 참 난감해졌다.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자갈밭 위로 카라반들이 보였다. 저기를 어떻게 가야 하나 둘러보는데 국도 옆에 난 작은 차도와 함께 '개조심'이라는 경고문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사유지로 보이는데 여기를 지나가도 되는 건지 염려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목줄이 묶인 큰 개들이 나에게 이라도 맺힌 것처럼 사납게 짖어대어 후다닥 도망치듯 지나갔다. 어제는 따뜻했던 포항이 오늘은 날씨를 시작으로 하루종일 내게 차가웠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바람에 밀리는 대로 하얀 거품을 내며 소리를 내는 푸른 바다와 카라반 옆 온실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귀여운 고양이 덕분에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귀여운 손님
밤이 되어 동그란 전구에 노란빛이 들어왔다

작지만 있을 것은 모두 갖춘 카라반 의자에 앉아 버스 타기 전 급하게 샀던 3분 즉석카레와 햇반과 작은 참치캔을 주섬주섬 꺼내어 소박한 저녁상을 차렸다. 침대 옆 작은 창을 통해 어두워진 바깥을 마주 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세상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했다. 고요한 저녁, 마음이 편안해져 생각을 정리하며 조용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혼자 있으면 언제나 음악을 틀어놓거나 보지도 않는 유튜브 혹은 TV를 틀어놓고 무엇인가를 했다. 코로나로 긴 재택근무 시간을 보낼 때도 늘 BGM처럼 음악이나 보지도 않는 영상들을 흐르게 하였다.


습관의 시작은 몇 년 전 호주에서 일하던 밤으로 돌아간다. 늘 일은 많았지만 점점 더 일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밤이면 바람소리에 흔들리는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와 곤충 우는 소리만 가득한 조용한 마을의 작은 방에 돌아와 대충 저녁을 먹고 다시 노트북을 켜고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정적 때문에 세상 모든 이들은 쉬고 있는 시간, 나만 일하고 있는 것 같아 왠지 울적해졌다. 어느 날, 기분 전환을 위해, 그리고 혹시라도 몰려올 잠을 깨우기 위해 개인 컴퓨터로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를 옆에 틀어놓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마치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긴장감으로 잠이 달아났다.


더 이상 나를 깨우는 소리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습관처럼 언제나 '소리'를 켜두었다. 소리가 없으면 허전한 기분이 들 것 같아 늘 소리가 함께였기 때문에 정적의 편안함을 알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서도 숙소에 돌아가면 잠들 때까지 보지도 않는 TV를 켜두었다. 카라반 의자의 맞은편에는 TV가 아닌 창이 있었고 그 창을 바라보며 정말 오랜만에 정적을 경험했다. 그동안 혹사 당했던 귀들은 평화를 되찾았고 소리가 존재할 때 느껴지는 긴장감이 사라져 마음 역시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소리'가 없었을 때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어 고요가 주는 이 평안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소리 아니 '소음'에 중독되어 나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정적의 미를 깨우치게 해 준 작은 창
따스한 침대에 누워 조용한 밤하늘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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