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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Mar 21. 2024

보성

평안: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

남해에서 버스를 타고 진주로 갔다. 해 질 녘 도착한 숙소의 우편함에 주인장이 말한 열쇠가 없어서 연락했더니 크리스마스 장식하느라 아직 숙소에 있는 주인장이 갖고 있었다. 전구 하나가 고장 나서 택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하여 당황하셨다. 위치 때문에 예약한, 크리스마스 데코 따위 안중에도 없는 나로서는 전구 하나 전기가 안 들어온다고 불평하지 않았을 텐데. 인상 좋은 친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방을 예쁘게 꾸미고 초조한 마음으로 택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다. 짐을 내려놓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친절한 주인이 추천해 준 맛집들 중 가장 가까운 일본 카레집으로 향했다. 추천 맛집답게 이른 저녁시간이었지만 식당은 이미 손님들이 많았다. 직원 없이 혼자 요리와 서빙을 하시는 이모님은 바쁜 와중에도 원래 반찬으로 나오는 직접 담근 절인무와 깍두기 외에도 친구가 오늘 김장을 담갔다며 맛있는 김치까지 내어주셨다. 소박한 친절을 내어주는 작은 가게는 맛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다시 찾게 되는 것 같다. 따뜻한 저녁으로 배를 불리고 밤에도 빛이 나는 진주성을 둘러보았다. 저녁에는 아쉽게도 촉석루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진주성벽을 따라 진주의 화려한 불빛을 비추는 남강이 계속 따라왔다.

진주성과 가까운 숙소에 도착할 때 해가 지고 있었다
맛있는 김장 김치를 내어주셨던 일본 카레 식당
화려하게 빛나던 남강대교

다음날 보성행 기차를 타기 위해 진주역으로 향했다. 아주 오래전 친구가 보성 녹차밭에 다녀와 보여준 사진 속 산 위에 층층이 심어진 녹차밭은 초록색 파도 같았다. 진주역 앞에 보성 녹차밭까지 가는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벤치에 줄줄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 옆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잠시 걸으니 텅텅 빈 커다란 주차장과 상점들이 있었다. 배낭을 앞뒤로 메고 녹차밭을 걸어야 하나 염려했는데 다행히 여행객을 위한 작은 쉼터에 락커가 있었다. 훨씬 가벼운 몸으로 녹차밭 입구로 가는 가로수길은 키 큰 나무들과 향긋한 숲내음이 가득찼다. 대나무 숲을 감싸고 있던 울타리는 이미 절반은 쓰러져있고 관광객들로 북적였다고 들었던 녹차밭은 너무 한적하여, 마치 이미 뜨겁게 타오르고 이제는 식어가는 숯불 같았다. 사람들의 손길이 줄어든 숲은 조금 음침했지만 야생과 더 닮아있어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고요한 숲을 나오는 길목에 자리한 바위 위엔 세월에 흐트러진 누군가의 소원을 담았던 돌멩이들이 가득했다.  

보성역 가는 길에 멈춰 섰던 득량역은 낡은 모습이 더 정감 있었다
기울어진 태양이 구름 뒤로 숨은 하늘 밑 숲은 더 신비로운 기운을 띄었다
세월 속에 흐트러진 사람들의 소원을 받치고 있는 단단한 바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지 오래된 듯한 대나무 숲은 푸른빛을 내며 스스로 잘 지내고 있었다
대나무 숲에서 고개를 들면 초록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가로수길을 내려와 주차장과 상점들이 있었던 곳에 돌아왔더니 이미 대부분 문을 닫았다. 아직 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무인편의점으로 갔다. 숙소가 있는 마을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고 고속도로 갓길로 걸어가야 하는데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둘러 사발면으로 저녁을 때운 뒤 배낭을 메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나가는 차가 많지는 않았지만 낙엽을 쓸어내는 스산한 바람이 부는 아스팔트 고속도로는 차갑고 무서웠다. 깜깜해진 하늘 아래 가로등 밑으로 보이는 마을입구가 진심으로 반가웠다.

없었다면 저녁을 굶을 뻔했던 보성 녹차밭 주차장 앞 편의점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나던 고속도로
정말 반가웠던 마을 입구 (사진보다 훨씬 더 어두웠음)

예쁜 한옥집 주인장 부부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부지런히 앞마당에 잔디를 새로 깔고 계셨다. 인상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별채 방 하나로 안내해 주시며 다원에서 걸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전화하면 차로 데리러 갔을 텐데 안타까워하시며 녹차를 주시겠다며 아침에 언제 일어나는지 물으셨다. 푸근함을 주는 아주머니의 표정과 말투 덕분에 고속도로에서 가져온 긴장감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하얀 이불 밑에 손을 넣으니 뜨끈한 아랫목에 얼었던 손도 녹았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문에 비쳐 잠시 문을 열고나가 볼을 차갑게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툇마루에 섰다. 아무도 없는 칠흑같이 깜깜한 밤 세찬 바람이 부는데 따뜻한 방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전감이 몰려왔다. 이불 밑으로 몸을 집어넣어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누위니 어렸을 때 누웠던 시골 외할머니집이 생각났다. 놀다가 새로 산 옷이 찢어져서 엄마에게 혼나서 한참 울다가 구석에서 잠들었던 나는 눈을 뜨니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있었고 옆에서 이야기하는 외할머니와 엄마의 편안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 나에게 웃으며 따뜻한 옥수수를 건네던 엄마가 기억났다.

문을 열면 다양한 크기의 장독들이 가지런히 서있고, 

뚜껑을 열면 암흑처럼 새까만 물에 비치는 하늘과 내 얼굴이 신기하여 간장 짠내를 맡으며 한참 바라보았던 장독 옆 배나무에는 아직 설익은 작은 배들이 매달려 있고,

배를 한참 바라보다가 급한 마음에 까치발 들고 배하나 따먹고 외할아버지에게 혼나고,

부엌 한쪽 벽에는 아궁이에 들어갈 나무장작이 쌓여있고,

아궁이 속 빨갛고 뜨거움 속에서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좋아서 계속 나무를 넣어 커다란 가마솥 물은 펄펄 끓고,

제각각의 나무 분재들이 마당에 투박하게 놓여있고,

툇마루에는 낡은 소쿠리와 체들이 햇볕에 말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감 가득했던 따스한 외할머니집.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 떠난 배낭여행 중 낯선 한옥집에서 어릴 적 외할머니와 엄마를 만나 잠시나마 평안 속에서 잠들었다.

겨울을 위해 차곡차곡 쌓여있던 나무 장작들
방 앞 툇마루에서 햇빛을 쬐던 아이들
아침에 마을 한 바퀴 돌고 언덕에 올라 바라봤던 평화로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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