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느린, 더딘, 천천히 움직이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오고 여행 내내 입었던 똑같은 옷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조만간 노숙자로 오해받기 십상인 모습에 마지막 여행지로 향했다. 이번 여행 첫 발을 떼었을 때부터 종착지로 결정했던 남쪽 섬, 청산도. 배낭을 앞뒤로 둘러메고 한적한 고속도로를 건너 보성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할머니들을 가득 실은 조그만 초록 버스가 도착했다. 창밖을 보며 계속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한 할머니가 거칠고 두꺼운 손가락으로 버스 문을 가리키며 내리라고 알려주셨다. 따스한 친절에 인사드리고 내리니 길 끝에 시외버스터미널이 보였다. 작고 조용한 시외버스터미널엔 5일장에서 장을 본 할머니 두어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니 완도행 버스가 도착했다. 조용한 평일 한낮의 버스에 올라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차가웠던 몸이 노곤노곤해져 금세 잠이 들었다. 고개를 떨구고 정신없이 단잠에 빠졌다가 깰 때쯤 부지런히 달린 버스는 완도 시내로 들어왔다. 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청산도행 배를 타기 위해 완도여객터미널로 걸었다. 한 시간여 걸으니 버스터미널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여객터미널이 나타났다. 평일 오후인데도 터미널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작은 섬이라 작은 배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외로 꽤 큰 배는 승객들을 가득 채웠다. 나들이 오신 어머님들 옆에 조용히 자리 잡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니 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배에서 내리니 펜션 주인아주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사라고 하시면서 딸이 불닭볶음면을 좋아해서 걱정이라면서도 결국 불닭볶음면을 사고 계셨다. 덜컹거리는 용달차를 타고 평지 끝에 작은 산들이 봉긋봉긋 솟은 풍경들을 지나치고 좁은 오르막길을 오르니 언덕 위 펜션에 도착했다. 펜션 마당 옆 작은 텃밭에는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키우는 채소들이 겨울이 무색하리만큼 파릇파릇하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 서서 보니 고요함 속 작은 마을 너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평안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풍경이 있을까?
2층 방에 짐을 풀자마자 석양이 절경이라며 아주머니가 추천한 목섬으로 출발했다. 나와 함께 배를 탔던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서로를 향해 내는 소리, 바람에 휘날려 갈대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 그리고 내가 만드는 발걸음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다가 다가올수록 육지에서 빠져나가는 작은 파도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점점 해가 지평선과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돌아올 때 괜찮을지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해 질 녘 풍경이 아름다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언덕을 넘어가니 바다를 가로질러 낸 둑길이 나타났다. 삐죽삐죽 끝이 날카로운 돌들에 파도가 부딪쳐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노을과 파도에 홀려 한참 사진을 찍어댔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아차 싶어 서둘러 걸었다. 둑길 끝 언덕 입구에는 '동행자 계실 곳'이라 쓰인 통에 기다란 나무 막대기들이 꽂혀 있었다. 언덕 오를 때 편히 가라고 동행자 데리고 갔다가 떠날 때 동행자를 두고 가라는 친절한 안내였다. 적당한 크기의 막대기를 들고 언덕 입구로 향했다. 무성한 나무들로 하늘이 가려져 나뭇가지 틈새로 비치는 어둠침침한 빛에 의지하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점점 빛이 사라지는 길 위로 완전히 깜깜해질 돌아오는 길이 떠올라 무서워졌다. 점점 작아지는 휴대폰 배터리에 불안해져 느려지는 발걸음에 결국 돌아서 길을 내려왔다.
해는 이미 산속으로 들어가 어둑해지고 마을에는 작은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오르막길, 뭉툭한 돌로 차곡히 쌓은 낮은 벽 위에 노랗게 변해가는 호박들이 줄줄이 선 모양이 재미있어 웃는데 건너편 평상에 앉아 노을 속에서 하루를 마칠 준비를 하시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머쓱한 미소를 보냈다. 할머니의 미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시는 할아버지께 웃으며 목인사를 하고 언덕을 올랐다. 물이 마른 작은 천을 바라보던 검은 고양이는 고요함을 깨뜨리는 내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서있는 나에게 경계를 풀었는지, 잠시 후 걸음을 옮겨 갈대밭 속을 뒤적거리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풀 우거진 곳으로 사라졌다. 어릴 적 갖고 놀았던 구슬이 생각나는 연두색 눈빛의 검은 고양이를 뒤로 하고 언덕을 오르니 어둠을 깨우는 전구조명으로 반짝거리는 펜션 입구가 보였다. 펜션 1층 식당 앞에서 숙소로 걸어가는 날 발견한 주인아주머니는 간식으로 먹으라며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검은 봉다리 하나, 그리고 접시에 담긴 고구마와 김치통을 건네셨다. 고구마만큼 따뜻한 아주머니의 마음을 양손 가득 들고 방에 들어와 열어본 봉지 안에는 사과와 귤이 가득했다. 배가 출출해지는 시간, 따끈한 고구마와 김치를 맛있게 먹고 간식으로 오물오물 귤까지 까먹고 나니 창 밖 깜깜해진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열어 나무 식탁이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어둠 속에서 반짝 거리며 빛을 내는 맞은편 섬마을, 새까만 하늘에 별을 가득 담은 밤하늘.
시커먼 바다에 바람이 불 때마다 희미하게 밀려오는 하얀 파도처럼 잔잔한 행복이 내 마음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와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