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느린, 더딘, 천천히 움직이는
조용한 아침 눈을 뜨니 어둠이 밀려나는 창 밖이 눈에 들어와 유리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시원하게 밀려왔다. 상쾌한 기분에 '아, 좋다'라고 혼잣말을 하며 둘러보는데 옆방 앞 나무탁자에 앉아 뭔가를 후루룩 먹는 낯선 여행객이 안경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괜스레 무안해져 원래 밖에 나갈 생각은 없었다는 듯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
하루 안에 슬로우길을 모두 걸어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최대한 많이 보고 싶어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1층에서 만난 주인아주머니는 어제 밤늦게 여행객이 왔었다며 안타깝다고 하셨다. 무슨 일인지 갸우뚱 거리며 아주머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옆방의 여행자는 예전에 청산도에 왔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떠나서 이번엔 자전거까지 갖고 돌아왔는데 하필이면 자전거가 고장 났다고 했다. 어젯밤 청산도에 도착했는데 오늘 아침 결국 다시 돌아갔다며 안타까워하셨다. 봄에 결혼을 올리면 아내와 함께 다시 오겠다고 했다는데, 나 역시 세 번째에는 청산도가 그 친구에게 꼭 길을 내어주길 바라며 길을 나섰다.
오늘도 줄지어 서서 햇볕을 기다리는 호박들을 뒤로하고 골목길을 내려가니, 길 가 집들에선 어제저녁과 달리 이른 아침을 여는 분주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어제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 바닷가로 나왔다. 밝아지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부지런한 오리들을 지나, 숙소에서 보였던 건너편 마을, 슬로우길 7코스 '돌담길' 쪽으로 향했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작은 집들은 모두 삐죽한 바위를 차곡차곡 쌓은 벽으로 감싸 있었다. 마을의 길은 꼬불거려 다음에 어떤 집, 어떤 길이 나타날지 알 수 없어 걸으면서도 계속 궁금해졌다. 마을 한가운데 갑자기 모아이를 닮은 석상이 서 있는 돌벽의 찻집이 나타나고, 돌담 안 쪽에 작은 배추들을 야생화처럼 피운 텃밭이 나타나고, 또 길을 걷다 보면 제멋대로 뻗은 대나무밭이, 붉은빛의 덩굴이 감싼 버려진 돌집이 나타났다. 산 뒤로 해가 뜨는 마을에서 오직 나만이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인데도 시골집들을 아무리 지나가도 인기척이 없다. 작은 섬에 나만 두고 모두들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미로 같은 마을의 끝자락에는 마을회관과 쉼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난 마을의 이름을 알았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남아있다는 '상서리'.
2006년에 세운 비석에는 1960년대 97 가구가 있었지만 30 가구만 남았다고 쓰여있던데 이제는 조금 늘었을까 아니면 줄었을까? 궁금해하며 걷는데 어제 본 것 같은 검은 고양이가 나타났다. 걷다가 나를 기다리는 듯 뒤를 돌아보며 잠시 멈췄다가 우아하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건너 어딘가로 들어갔다. 놓칠까 서둘러 뒤쫓아가보니 대문 없는 벽돌집 현관 기둥에 경로원 목판이 걸려 있었다. 해는 이미 하늘에 닿았는데 다들 어디 가셨는지 마을은 여전히 적막했다.
슬로우길 6코스 '다랭이길'에 들어서니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논밭을 가득 채운 갈대들은 한낮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마을 차도로 작은 용달차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상서리 안에서 봤던, 맞은편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며 '딴따단' 경쾌한 음악소리를 내던 귀여운 빨간 차의 정체를 알아냈다. 갈대밭 사잇길을 걷는데 뒤에서 익숙한 음악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뒤를 돌아 길을 내주었는데 산불진화차라고 쓰인 빨간 차가 확성기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멀리서 아주 가끔 지나가는 차 외에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적막한 작은 섬, 2시간 여마다 어디선가 소리를 내는 이 작은 차가 하루 종일 반가웠다.
간판이 빛에 바래 이름이 뭔지 당최 알 수 없는 정육점 앞, 뒷짐을 한 등이 조금 굽은 할머니가 서 계셨다. 지나가며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렸더니 할머니는 밑도 끝도 없이 할아버지 오시면 큰일 난다면서 손주들이 잘 안 내려온다고 서운하다고 하셨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도 잠깐 있다가 갔다면서 보고 싶다 하셨다.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찻길을 계속 바라보시면서 추임새처럼 할아버지 보시면 큰일 난다 하셨다. 무슨 말씀인지 갸우뚱하면서도 할머니의 외로움이 전해져 대화를 이어나갔다. 퍼즐 같은 할머니 말씀들을 조각조각 맞춰보니 가게를 하시는 할머니가 적적하셔서 손님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는데 할아버지는 그게 못마땅하셨던지라 할머니를 혼내셨던 거라. 할아버지는 손님들 귀찮으셨을까 봐 그러셨겠지. 손님도 아닌, 길 지나가는 여행객인 나와 얘기를 나누시면서도 불안하여, 할아버지 올 때 다 되었다면서 어서 가라고 하셨다. 할머니께 인사하고 걷다가 돌아서서 뒷짐 진 할머니 뒷모습을 보는데 청춘 다 보내시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하고 싶은 대로 못하시는 할머니가 짠했다.
언덕길 옆 삐뚤게 선 전봇대 줄 위로 까마귀들이 줄줄이 앉아 까악까악 거렸다. 전봇대가 가까워지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셀 수 없이 많은 까마귀들이 이쪽으로 날았다가 저쪽으로 날았다가 내 위를 돌았다. 파란 하늘 위 검은 새들의 비행이 너무 경이로워 보여 계속 눈으로 쫓아갔다. 까마귀들은 이리저리 날다가 후드득거리며 소나무 높은 가지들 위에 줄줄이 앉았다.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아 까마귀들에게 '해치지 않아요'라고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까악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였다.
반나절을 걸으니 간식으로 챙겨 온 뻥튀기를 다 먹고도 지쳐버렸다. 걷다 보면 작은 구멍가게나 식당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꼴랑 어제 먹고 남은 뻥튀기 반봉지와 물 한 통만 챙겨 온 어리석었던 아침의 내가 한심스러웠다. 뒤돌아 가도 먹을 것을 구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단 걸 알기에 무거운 발을 옮겨 언덕을 올라 장기미해변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