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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3편

slow: 느린, 더딘, 천천히 움직이는

by 시오

소나무 속속들이 숨은 까마귀들의 눈총을 받으며 넘어간 언덕 위, 햇볕이 얼굴에 닿아 따가워지고 갈증으로 빈 물통이 아쉬워지는 한낮이었다. 끝이 휘어져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산책로 양 옆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그늘을 만들어 시원해지는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갑자기 하얗게 빛을 내는 바다가 나타나 눈이 부셨다. 뜨겁게 빛을 뿜어대는 태양 아래, 그리고 보석처럼 빛이 나는 바다 위, 그 중간에 새까만 섬이 저 혼자 우뚝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섬이 궁금해져 서둘러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 위에서 잔잔해 보이던 파도는 바람을 맞아 세차게 바위를 깎아내고 있었다. 조금만 발을 내딛으면 바다가 닿는 바위 가장자리까지 내려와도 그 신비로워보이는 검은 섬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아 어떤 모습인지 눈에 잡히지 않았다.

그늘 한 뼘 내주지 않는 장기미해변에 내리쬐는 이른 오후의 햇빛은 서둘러 나를 재촉하였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해변의 안쪽으로 들어가며 둘러보아도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이상하다고 의구심이 들 때 산으로 향한 돌계단과 파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이정표를 살펴보니 범바위는 바닷가 평지가 아니라 방금 넘어온 언덕보다 더 높은 산 위, 범바위 전망대에 있었다. 더 이상 마실 물도 간식도 없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숨을 돌리기 위해 서서 뒤를 돌아봤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펼쳐지는 층층이 다랭이밭과 파란 하늘, 오른쪽으로 돌리면 절벽 아래 에메랄드 빛 바다가 하얀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언덕 위에 불어오는 바람은 뜨거워진 얼굴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윤슬로 반짝이는 바다 위 우뚝 선 검은 섬
베란다에 깔아 두면 얼마나 예쁠까 하고 탐이 나는 돌이 빛나는 장기미해변
가파른 돌계단 위에서 왼편을 바라보면 층층이 쌓인 다랑이밭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푸르른 바다와 하늘이 닿아 있었다.

범바위에 닿기 전, 칼바위를 만났는데 두툼한 바위를 누가 싹둑 자른 것이 손잡이가 날아간 도끼처럼 보였다. 칼이든 도끼든 참으로 요상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바위 뒤, 그 신비로웠던 검은 섬이 정체를 드러냈다. 배가 닿기도 힘들 것 같은 바위섬 한쪽에 머리가 큰 하얀 기둥이 서 있었다. 바다로 나간 배들에게 어둠 속에서 나 여기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빛을 내는 등대인 건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 양쪽 우거진 나무들이 만든 그늘 아래 평평해진 숲 길을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무에서 떨어진 앙상한 가지들과 마른 잎들이 소리를 내었다. 조용한 숲 길 위, 내 귀로 들어오는 '바스락바스락' 그 소리가 참 좋았다. 범바위에 도착하여 잠시 호랑이 닮은 바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암만 봐도 바위 하나뿐이니 그것이 범바위일 텐데, 왜 호랑이 바위라고 불리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잔뜩 웅크린 호랑이 모습이라고 하여도 왠지 허리 뒷부분은 어딘가로 사라진 듯한 아주 애매한 형태였다.

바닷가 마을 권덕리로 내려가는 길, 말탄바위 위에서 잠시 멈춰 바다를 바라보다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는 작은 강아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뒤로 동행자 아주머니가 보였다.

10년이 지나도록 매일 아주머니와 산을 올랐던 이 귀여운 포메라니안은 이제 노견이 되어 관절에 좋지 않아서 애타는 아주머니 마음은 모르는지 산책 시간이 되면 산으로 가자고 조른단다. 작은 개는 가파른 계단을 겁도 없이 성큼성큼 앞서서 내려갔다. 퇴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남편을 따라 머나먼 남쪽 섬에 내려오신 아주머니는 이제 도시에 대한 그리움에 옅어져 이 작은 섬이 편안해졌다고 하셨다.

도끼같아 보였던 칼바위
작은 무인도는 넓은 바다에 혼자 떠있다.
웅크린 호랑이, 늠름하게 선 호랑이, 귀엽게 앉은 호랑이. 범바위 전망대엔 호랑이 세 마리가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귀여운 호랑이.
바닷 속 양식장은 파란 바다 위에 그린 그림같았다.
범바위에서 내려오던 길, 말탄바위가 너무 멀어보였다.
말탄바위에서 만났던 아주머니와 강아지
허기가 져 더 탐스럽게 보였던 과일나무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4코스 낭길에 들어섰다. 바다를 따라 난 길은 소나무들이 해를 가려주었지만 낭떠러지 길처럼 좁아 혼자 걷기 좋은 길이었다. 소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해는 점점 바다와 가까워지고 길에서 만난 빨간 과일나무가 너무 탐스러워 보이는 시간이 되었다. 이대로 계속 걸으면 아무도 지나지 않는 길 위에 혼자 쓰러져 밤을 맞이할 것 같이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옆길로 가면 서편제 영화 촬영지가 150미터 앞에 있다는 표시가 있었지만 지금 서 있는 골목길 끝에 있을 빵집이 문을 열었기만을 기도하며 걸었다.

빵이 얼마 남지 않은 매대에서 빵 하나를 집어 우선 허기를 달랬다. 그제야 선착장으로 향한 산책길 위 해가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낮에 힘차게 빛을 뿜어대던 태양은 작은 마을을 감싸 안은 산봉우리 사이로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덜어내며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추는 바다 위엔 무엇을 키워내는 양식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줄을 맞춰 서서 잔잔한 파도를 맞고 있었다.

선착장 근처 이른 저녁 시간으로 한가한 식당에 들어가 순두부찌개를 시켰다. 지금 막 만든 것 같이 신선한 10가지나 되는 밑반찬이 가지런하게 놓였다. 반찬 하나하나 맛있어서 순두부 뚝배기가 나오기 전에 밥 반그릇을 비웠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둠이 몰려온 하늘은 붉은빛을 내었다.

배가 들어오고 사람들을 뱉어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금세 사라지고 텅 빈 배를 바라보며 막차를 기다렸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야 주황색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기사님과 나 혼자 탄 버스는 어둠을 비추며 꾸불꾸불한 시골마을 길을 달린다. 갈색 줄무늬가 있는 주황색 털을 날리며 노란 눈으로 길을 비추며 달리던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가 생각났다. 나를 내려준 빈 버스는 승객이 없어도 꾸불꾸불한 시골길을 다시 달려갔다. 종일 홀로 부지런히 걸은 길, 시간만 게으름을 피우듯 하루가 길었다. 밤하늘 촘촘하게 채운 작은 빛들을 올려다보며 반짝이는 펜션으로 향한 오르막길을 마지막으로 걸었다. 청산도답게 고요 속에서 또 나만 소리를 내었다.

선착장으로 향한 길 위에선 언덕 아래 마을과 바다과 한눈에 들어왔다.
다랭이밭, 소나무, 갈대밭, 작은 마을, 바다, 양식장 그리고 높지 않은 산, 가장 청산도스러운 풍경이었다.
석양이 내리는 바다 위 겹겹이 쌓인 것들이 구름에 가려진 산인지, 해무에 가려진 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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