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9살 무렵의 내가 우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의 울음소리는 유독 컸다.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무서움이 컸다. 처음 겪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이 나를 크게 울렸다. 꽤 오래전 일이 됐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금을 좋아했다. 매일 받는 용돈의 대부분을 차곡차곡 모았다. 하루 500원의 삶이었지만 마음만은 풍족했다. 2~3일 정도 용돈을 모은 뒤, 집 앞 우체국에 저금을 하러 다녔다. 친척이 주시는 용돈, 세뱃돈 등을 열심히 모으다 보니 통장에는 무려 10만 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 쌓이는 돈에 뿌듯함이 더해지자, 나와 우체국 통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날도 저금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아버지 친구가 용돈을 주시는 바람에 지갑에는 무려 15,000원이라는 거금이 담겨있었다. 나는 통장을 배불릴 생각에 신나있었지만, 곧장 우체국으로 가지 않고 오락실에 들어갔다. 15,000원도 벌었겠다. 200원어치 게임이 무슨 대수냐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됐다. 게임을 끝내고 오락실을 나오는 내 뒤로 두 명의 형이 따라 나왔다. 그중 한 명이 내 손에 있던 지갑을 잽싸게 뺏고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면 돌려주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 더 황당한 건 내가 눈물을 머금으면서 그 사람과 가위바위보를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형이 내민 건 보자기, 내가 내민 건 가위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이제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형들은 나의 반대쪽 손에 있던 통장을 낚아채 달아났다.
나는 정말 하늘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은행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세 블록 정도 되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는데 그 길을 지나오는 동안 꺼이꺼이 울어댔다. 수도 없이 울었지만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까지 운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울음소리에 놀란 우리 가족은 버선발로 뛰쳐나와 내게 왜 우냐고 물었다.
“형들이…. 가위바위보 하자 해서……. 내가 이겼는데……. 엉엉”
너무 슬퍼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그 와중에 내가 이겼다는 걸 강조하던 게 기억이 난다. 돈을 뺏겼다는 사실보다 이겼는데도 뺏겼다는 사실이 더 억울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게 범인을 찾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범인은 찾기 싫었다. 그 무서운 형들이 내게 또 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바닥에 떨어뜨린 셈 치자고 스스로 최면을 걸 예정이었다. 찌질하지만 속 편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범인을 찾게 됐고, 지갑에 있는 돈은 사라져버렸지만, 통장에 있던 10만 원은 사수할 수 있었다. 나쁜 형들은 지갑에 있던 돈만 쏙 빼가고,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는 통장은 그대로 바닥에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저금을 하지 않게 됐다. 우체국에 가는 길이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저금을 하기 싫어서 용돈을 일부러 다 써버린 날도 있었다. 그 사건 이후 2년이 지날 때까지 오락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아예 다른 길로 돌아간 적도 많았다.
‘오락실만 가지 않았으면..’ 돈을 뺏긴 게 내 잘못이라고 여긴 적이 많았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심했어야지’라며 조심성 없는 아이로 치부하기 바빴던 어른들이 대부분 이었다.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형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최대한 돈을 덜 뺏길 방법을 짜내느라 열심히 노력하겠지.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거의 나에게 몇 마디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저금은 계속해도 된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찌질의 역사’는 쓰이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찌질이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