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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Aug 20. 2023

우울할 땐 우울을 찾자

<생각 꾸러미>

정준일 - 'LOVE YOU I DO' 앨범 커버


울적할 때 찾게 되는 목소리가 있다. 가수 정준일, 이소라 같은 목소리가 그렇다. 그들의 노래는 내가 가진 우울한 감정을 한껏 끌어모아 마음 한 가운데로 이끈다. 심연으로 떠나는 '우울호'의 항해를 맡은 선장 같다.

배 위에서 듣는 선장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애달프다. 세상의 모든 이별과 고통을 짊어진 듯한 태도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소리를 낸다. 선장님과 함께라면 우리의 항해는 순조로울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들의 노래는 대개 담담하다. 감정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던지거나 몰아세우지 않는다. 단지 속으로 삭이다 못해 터져 나온 감정을 노래할 뿐이다. 그들의 '감정 폭탄'은 무해해서 더 안타깝다.

"이 노래를 들으니 네가 생각난다. 보고 싶다 ㅇㅇ아"

그들의 공연영상에 항상 달리는 유튜브 댓글처럼, 우울호 선원들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선장 덕분에 자신의 항해를 할 수 있다.


출항한 배가 어느덧 심연에 닿으면 마음은 무거워진다. 이때부터는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마음이 나를 다스리는 상태가 된다. 하늘을 보고 누워 물 위를 둥둥 떠다닐 때처럼 온몸에 힘을 빼야 할 시점이다.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탓에 지금껏 듣던 노래는 가사 없는 BGM으로 전락한다. 나에게는 절대 없는 것처럼 억눌러왔던 우울감과 마주할 준비가 된 셈이다.


어렵게 대면한 우울은 생각보다 몸집이 크지 않다. 이렇게 작은 녀석 때문에 그동안 전전긍긍해 왔다는 게 우스울 정도다. 무엇이 그토록 불만인지, 어린 치와와처럼 잔뜩 화를 내는 녀석에게 말을 건다. 녀석이 털어놓은 불만은 대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너의 마음을 잘 보살펴 줘" 따위의 조언을 듣고 녀석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나를 잡아먹으려 했던 우울감이 이토록 초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심연을 벗어날 준비를 한다. 우울호의 뱃머리를 돌려 항해를 시작하자 노랫말이 다시 들린다. 선장님 목소리는 처음보다 힘이 없다.


응어리진 감정을 풀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우울은 우울로 다스리는 게 효과적이다.

슬픔이 날벌레처럼 날아다니는 숲속에 날 밀어놓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며 해결책을 찾는다. 즐거운 영화, 코미디 프로그램 따위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부정적인 마음과 마주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가시가 돋친 감정을 구석으로 몰아넣기는 더 어렵다.


네가 전 남자친구의 연락을 받았던 그날도 내게는 몹시 우울한 날이었다. 나는 분명 너와 같이 있었지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나를 의식한 듯 넌 내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지만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너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네 잘못이 아니었다. 우리 관계의 대가로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었기에 말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관계를 완벽히 정리하겠다며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똑같은 이유로 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불편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내 옆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던 너를 뒤로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이어폰을 찾았다. 우울할 때면 생각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몸을 움직일 만한 에너지도 없어 소파에 앉은 채로 한 시간 동안 노래만 들었다. 그사이 내 마음은 우울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우울감에 사로잡힐수록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어렵게 대면한 우울은 또 "너의 마음을 잘 보살펴 줘" 따위의 실없는 조언을 내게 건넸다. 녀석의 몹집은 여전히 작았다.


심연에서 올라와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감당해야 할 상처에 지레 겁을 먹은 것 같다. 내가 네게 주는 사랑만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 맘을 졸였다.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서도 이윤을 챙기려 욕심부리는 내가 괜스레 작게 느껴졌다.


네게 고마운 점도 생각났다. 이렇게 감정에 취해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을 오랜만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 평범한 일상도 새롭게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네 과거에도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전 남자친구의 연락을 숨기지 않고 다 이야기해 준 솔직함과 약간의 무심함에도.


적당한 우울감에 기분이 꽤 나아졌다. 내가 우울호에서 내리자 선장과 선원들은 목적지를 잃은 듯 바다를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이어폰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네가 잠든 침대로 다시 살며시 들어간다. 네 잠이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은 채 너와 함께할 나를 상상한다. 너의 밤이 평온하길 바란다.



우울할 때 들으면 좋은 노래

이소라 - 이제 그만

https://youtu.be/Sa1-0pOnM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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