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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Jun 23. 2022

제철을 살고 있다

서른에게 11

비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일정이 가득한 날의 비는 도통 반갑지가 않지만, 적당한 창가 근처에 앉아 비를 관람하는 일은 꽤 평화로워. 요 며칠 유독 덥고 습했거든. 가뭄으로 온 나라가 애를 먹는데, 땀은 조금만 걸어도 비 오듯 쏟아지는 게 참 모순이라 느꼈어. 사람들의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을 다 모아다 밭과 논에 뿌리는 것도 괜찮지 않으려나(너무 짤까?), 싶은 공상들을 찬물로 몸을 씻을 때마다 자주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장마는 조금 반갑네. 그동안 모아뒀던 걸 게워내듯 와라락 떨어지는 빗줄기들을 보고 있으니, 속이 시원하기도 해. 빗소리도 듣기 즐겁구. (물론 이제 내 방은 점점 습해지겠지만..)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에 비해 잘 챙기지 못한다는 약간의 죄책이 늘 있거든. 가깝게 여기는 이들의 생일 알림을 보고도 선물을 챙겨줄 상황이 안되어 모른 척 지나간 적도 몇 있어. 그중 하나였던 동생을 오늘 오랜만에 만났다. 빗길을 뚫고 동네까지 와주어서 좋아하는 식당과 카페에 데려갔어. 생일을 제대로 못 챙겼으니 밥이라도 사줘야겠다는 마음이었지. 동생은 영화 미술 관련 일을 하는데, 최근에 전주 국제 영화제 프로젝트를 맡아서 몇 달을 전주에 머물다 왔어. 


"제주에 가서 좀 쉴까, 했는데 제주도 쪽 공고가 하나 떠서 그쪽으로 넘어가게 됐어. 다음 주부터 다시 시작이에요."

"좋네. 새삼 이전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졌다, 너."

"그래요? 요즘 그런 얘길 많이 듣네."


일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단단해 보이고, 마음 여유가 늘은 것 같아서 보기 좋더라.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의 불안을 메우려고 일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 강했거든. 그래서 좀 편히 푹 쉬라는 이야기를 많이 건넸던 기억이 있어. 혼자 살아서 금전적인 부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커리어도 일찍 시작했는데 무어가 저렇게 불안할까.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만큼 본인에게도 좀 나눠주면 좋을 텐데. 아끼는 사람에게는 잘만 나오는 말들이 스스로에게는 어색하고 자격이 없다 느껴질 때가 있잖아. 나만 해도 갑작스레 한 달가량을 수입 없이 쉬게 되었을 때, 말로는 방학이라 여기겠다면서도 불안함 때문에 제대로 쉰 기억이 없거든. 지금 생각하면 동생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데 지금은 일하기 싫다, 하면서도 하는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져. 눈도 생기로 가득하고, 생글생글 웃는 게 이전보다도 더 꾸밈이 없어. 그 얼굴을 한 채로 내가 겪는 직업적 고민에 열심히 사랑스러운 답을 찾아주고 있는 게 참 건강하고 편안해 보이는 거지.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비가 잠깐 잦아든 틈을 타 식당에서 나왔어. 식당의 분위기부터 꽤 이국적이기도 했고, 옆 테이블에 일본 손님들의 대화 소리 덕에 괜히 여행 온 기분을 즐기던 중이었거든. 물기 가득한 여름 공기가 꼭 좋은 꿈을 이어 꾸는 것만 같아서, 카페로 가는 길을 일부러 빙 돌아서 갔어. 자주 걷지 않는 골목을 걸었더니 자주 멈추게 되더라. 비를 온몸으로 반기는 듯한 꽃의 모양이 웃겨서 한참을 왜 그런지 떠들고, 잘 만든 모양새의 집들을 구경하며 볕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포부를 문득 내세우기도 하고, 카페에 도착해서도 하릴없고 귀여운 것들을 자주 발견하며 시간을 보냈어. 작은 감탄이 다분한 날은 왠지 꼭 잘 살고 있는 기분을 준다. 이 마음을 오랜만에 느꼈다는 것이 조금 서글프지만 무척 반가워. 건강한 징조야. 더 잘 살아지려나 봐. 더 사랑스러운 장면들로 이 계절을 채워야지 싶어. 제철을 살고 있으니까, 즐겨야지. 여러모로 동생의 기운 덕을 많이 본 낮이야.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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