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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Nov 06. 2023

아무렇지 않게 행복해지기.

가볍고 튼튼한 보호막

몸은 바빠도 마음만은, 하고 자주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마음만 바쁘지 않다면 눈앞에 닥치는 여러 일들을 꽤나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로부터는 줄곧 그래왔다. 멋대로 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늘 조금은 남겨두어야 차곡차곡 쌓이는 책임에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해내야 할 것들이 쌓이는 시기를 차차 맞이하고 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서른이 두 달도 남지 않았을 테지만, 한국도 이제는 만 나이를 쓴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로부터는(더 정확히는 일본어를 배움과 동시에 줄곧 일본에 가기 시작하고부터) 도로 스물여덟이 되어있는 감각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나는 태어난 지 28년째가 맞는걸. 마침 딱 '서른'을 앞둔 나이에 전국적으로 만나이화, 라니. 덕분에 20대를 2년 더 즐기게 된 운 좋은 사람이 되었다. 줄곧 생각해 왔지만 삶에는 꽤나 드라마 같은 순간이 많단 말이지.


인생에 있어 큰 간절함이 없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나를 붙잡던 콤플렉스 같은 존재였다. 이게 아니면 안 돼,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반짝이다 못해 흘러넘치는 눈빛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뭐라고 이렇게 태평하게, 적당히 꿈만 꾸나.' 싶은 마음이 비죽비죽 올라왔다. 꽤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나의 간절하지 않음을 '그래도 되는' 것처럼 모두가 여겨주는 환경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덩달아 피어오르고는 했다. 아주 간절하지도, 아주 여유롭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는 절대 눈에 띄지 않을 것만 같은 직업의 세계에 몸을 담그고 있느라 더 그랬던 걸지도 몰라.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면 늘 가슴 한쪽이 저릿해져 왔다. 나 이걸 마냥 재밌다고 보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고.



닿아,라는 이름을 짓게 된 건 그냥 나답게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뭘 하든 결국 내 이야기고, 그게 누군가에게는 꼭 의미 있게 닿기를. 실제로 스스로를 닿아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부터는 여러 고민들이 가벼워졌다. 특정한 직업 없이 '이것저것 하는 애'로 스스로를 설명해야 할 때의 구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나의 느긋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그 자체로 좋아해 주는 이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에 나를 꾸역꾸역 집어넣을 시간에 내가 가진 평화로움을 무기로 만들자,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는 점을 더 뾰족히 만들자, 찔려도 아프지 않을 낭중지추가 되자, 하고 마음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간절하지 않음은 달리 보면 건강하다는 증거일 테니까. '그렇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하고 다음 이야기를 따라 흐르는 운명론자적 기질도, 삶에서 늘 도망갈 구석을 마련해 두는 것도 전부 나를 필요 이상으로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만들어 낸 보호막일지도 모르니까. 


빛이 좋은 날 군데군데 부서져 있는 빛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는 일이나, 이따금 만나지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마음껏 바라보는 일.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며 점점 시간이 쌓이는 얼굴을 찬찬히 훑는 일. 좋아하는 가게를 방앗간처럼 들르며 사장님에게 눈도장을 찍는 일. 취향에 맞을 것 같은 처음 보는 술을 품에 안고 집까지 걸어가는 일. 좋아했지만 단종되었던 과자가 재출시된다는 소식을 듣는 일. 떠오르면 금세 웃음 지어지는 것들을 주머니에 한두 개씩 넣어 다니듯 마음에 품고 사는 삶이 좋다. 간절할 필요가 사라지는 삶이 좋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삶이 좋고, 쉽게 즐거워지는 마음이 좋다. 나를 작아지게 만들던 것이 실은 나를 따뜻하게 만드는 커다란 외투같은 것이었구나, 생각하면 귀여운 할머니라는 꿈을 어쩐지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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