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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Nov 13. 2023

모르긴 몰라도 계속 즐겁기는 할 테야

사람 좋아 인간의 어린 시절

기억하는 가장 어린 나의 순간은 대부분 원효로에 있다. 일곱 살에 지금의 동네로 건너오기 전까지는 그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 지금의 사람을 좋아하는 성미가 그쯤에 열심히 기반을 다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원효로에서는 유독 동네 어른들과의 기억이 짙다. 유치원도 늦게 들어갔고, 놀이터에서 또래를 기다리는 일보다 동네 상점가를 돌며 고개를 빼꼼 내미는 일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꼭 풍선껌 하나를 더 쥐어주곤 했던 원마트 사장님, 바로 옆 숯불갈비집 사장님, 원마트 앞 차양 아래 자주 앉아계시던, 반갑게 달려가면 얼굴을 구겨 환하게 웃어주시던 복순이 할머니.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거리 속에서 나를 반겨주던 얼굴들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처음 보는 어른에게도 동네에서 마주치면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넸던 터라 엄마아빠는 나와 거리를 지날 때면 자연히 '아 닿아 부모님이시구나!'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 됐었다. 거리의 모든 어른들이 이름을 알던 아이는 자라서 단골 가게 사장님들에게 시시콜콜 말 거는 걸 좋아하는 술꾼이 되어버렸고... 누군가의 호의나 호기심을 알아채는 순간 기꺼이 그만큼의 정보를 내어주고 싶어 하는 성격도 이 시절의 영향이 클 것이다. 결국에는, 사람에게 예쁨 받는 걸 참 좋아했고, 지금 역시 그렇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는 감정을 처음 피부로 느꼈다. 내가 잘하면 상대 역시 나에게 잘해준다는 것을 절대명제처럼 믿었던 열세 살에게는 꽤나 얼떨떨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분명 약이 오르는 순간이 많았는데, 그 자체가 낯설어서 화도 못 냈다. 늘 모범생, 천사 같은 말을 칭찬이랍시고 들어왔던 것이 나를 더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그쯤에 함께 깨달았다. 내 삶이 무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적당히 모른 체하며 지냈다. 본격적으로 학업에 부담을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그 문제를 마냥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나고 보니 분명한 따돌림이었는데, 점심시간마다 책상을 붙여 급식을 먹는 아이들 사이에서 매번 혼자 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걸 보면 눈치가 크게 없기도 했고, 그 시절의 나 꽤 긍정적이고 강했던 걸지도. 하지만 어딘가 답답한 기분이 그 시절 내내 사라지지를 않았다. 집에서의 나와 밖에서의 나 사이 간극을 알아차렸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는 모르는 채로 졸업을 했다.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나를 최대한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고, 그래서 고등학교 1 지망을 통학할 수 있는 거리 중 가장 먼 곳으로 적어냈다. 그게 풍문여고였고,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에 종로 거리의 향수를 잔뜩 묻혀둘 수 있었다. 가볍게 거절하는 법을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도 익히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를 보며 사람들이 건네는 감상 중 가장 의외인 것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말이다. 여전히 모든 감정의 끝이 눈물인 나에게 있어서는 꽤 큰 변화이기도 하다. 좋은 인상으로 남는 법을 곧잘 알고, 편견 없이 상대를 대하고, 세세한 호의를 건네는 법을 알지만 늘 일정 이상의 거리가 느껴지는 점.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스스로 실망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래서 굳어진 관계에서의 기대감을 걷어두는 버릇.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지만 거절을 해야 한다면 재빠르게 차가워지는 눈빛.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의 단편들이 만들어냈을 주변의 새로운 감상들이 흥미롭다. (물론 여전히 따뜻하고 다정한 닿아도 있어요.. ) 특별히 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기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흔적들을 훑는 일들이 조금 더 즐거운 때를 지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나는 또 변해갈 테니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만 잘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또 쌓여나갈지 막연히 기대하면서. 곧잘 흥미로워지는 눈빛과 금세 올라가는 입가를 가진 해맑은 할머니, 정도라면 참 귀엽고 좋을 텐데,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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