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게 07
촬영을 갔다가, 투표를 하고, 출근을 했다. 프리랜서의 장점은 남들 일할 때 놀 수 있다는 거고, 단점은 공휴일이든 주말이든 남들 쉴 때 일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지. 촬영 장소가 집 근처이길래 연남동을 거쳐 걸어가는데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주말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나들이 온 듯 한 사람이 많지? 했다가 이내 공휴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어. 오늘 촬영 준비를 다 하고 나가려는데, 새삼 내가 너무도 재미없는 얼굴로 생을 살고 있는 거야. 운동을 마치고 잠시 생기가 돌거나, 촬영을 할 때 한껏 반가운 얼굴을 끌어올리거나, 애인과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거나 하는 순간이 아니면 일터든 걸어 다닐 때는 내내 표정이 다 빠진 얼굴이야. 이사를 갈 때가 된 걸까? 볕을 더 받아가며 살아야 하나. 예전엔 바로바로 하던 설거지도 꼭 하루가 지나서야 하고, 빨래를 하고 널어둔 옷가지들이 다 말라도 며칠을 걷지 않고 그대로 둬. 그 이상 쌓아두지는 않지만, 한 템포씩 느려진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감각이 있잖아. 내가 이 공간을 이전보다는 덜 사랑하고 있구나, 싶은 마음. 예전에 고양이 키울 때만 해도 집에서 혼잣말을 참 많이 했는데, 지금은 거의 안 한단 말이지. 근데 오늘은 일부러라도 나한테 말 좀 걸어야겠다 싶었어. 촬영장 가서 한껏 밝게 굴어야 해서 텐션을 올려야 하기도 했고, 내가 너무 조급하고 불안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조급함이 얼글로 몸으로 번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자꾸 잊고 빠뜨리기만 하는 것 같은 거야. 즐거이 생을 누벼야 그것과 닮은 일들을 만날 텐데. 뭐가 혼자 이리 심각한지 모르겠는 거지. 그래서 열심히 거울 보고 소리치다가 나왔어. '닿아야, 괜찮아. 뭐가 그렇게 급해 혼자. 조금만 더 하던 대로 해보자. 도망칠 생각 말고 그냥 조금만 더 꾸준히 해보자. 잘하고 있다니까 진짜로?' 그러니까 마음이 조금 나아지더라. 촬영도 무사히 잘 마쳤어. 벌써 세 번째 호흡을 맞추는 브랜드라 더 반갑기도 했다.
해가 지날수록 볕이 강해지는 것 같아. 걸어서 출근이 점점 힘들어지는 날씨가 되어버렸다. 오늘도 투표 핑계로 버스를 탔어. 글을 쓰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요즘 내 생각 중 주된 것들이 다 '~했어야 했는데'로 끝나서 더 급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아. 좀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는데, 이 참에 걸었어야 했는데,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오늘 안에는 끝내야 하는데, 같은 작은 후회들이 매일 꼭 있거든. 좋아하는 일로 이렇다 할 선명한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니, 마음을 의지할 구석을 하루를 부지런히 보내는 데에 몰아두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네. 막연한 앞날을 빼곡히 계획하는 일보다 당장 하루를 내 마음에 드는 모양으로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지. 여하튼 요즘 그래. 내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하루(요즘 말로는 '갓생' 이라고 한다?)의 모습과 조금만 동떨어져도 맥이 풀리나 봐. 하루 중 잘 해낸 것, 예쁜 순간을 만난 것들을 조금 더 짙게 기억해야겠다 마음먹었어. 나 오늘 그래도 9시에 침대에서 나와서 오전 운동하기 싫은 거 참고 꾹 했다? 설거지도 바로바로 하고, 여행 짐도 다 풀었어. 내일은 마른빨래를 갤 거야. 그렇게 다시 칭찬을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하던 일 하면서 열심히 지내볼래. 안주하는 것이라 생각 않고 우선 하루를 온통 선명하게 보내는데 애써볼래. 나를 위해서라도 그래야겠어. 퇴근주가 땡기지만,, 퇴근하고 걸어서 퇴근한 다음 저녁 운동할 거다! 가려운 곳을 결국 딱지가 지도록 긁고, 놔두면 잘 아물 딱지를 굳이 또 떼어내는 끈기를 더 건강하고 멋진 곳에 쓸래 ! ( 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