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게 09
오늘은 눈을 뜨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 잠을 더 잘까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누운 채로 한참을 있었다. 오늘 내 첫마디가 뭐였는 지 알아?
" 어우,,,, 미친년. "
어제의 나의 감정은 진짜였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어. 화가 난다고 그걸 그대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고. 더욱이 그 모습을 가장 아끼는 사람한테 보여주면 안 됐어. 술의 탓을 하는 일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지만, 술 탓을 하고 싶을 만큼 속이 상하더라. 어제 나는 거의 이별할 생각까지 했었나 봐. 한 구석에는 반지가 빠져 있었어. 조심스레 반지를 다시 끼고, 부러 신나는 여자 아이돌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두고 운동을 시작했어. 자, 차차 복기를 해보자.
어제는 회식이 있었고, 애인을 제외하고는 술자리가 생긴 것이 오랜만이라 신이 났어. 막차 시간에 걸려서 1차를 마치고, 남은 사람들끼리 2차까지 갔지. 2차는 또 생맥주 라인업이 꽤 괜찮은 거야.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가 있더라고. 그렇게 두어 잔을 더 마시고 헤어졌지. 애인도 마침 근처에서 회사 팀장님과 회의 겸 맥주 한 잔을 하고 있다길래, 자리를 마치고 쫄래쫄래 보러 갔어. 이미 놀고 싶은 마음은 저 꼭대기까지 차올랐어. 가는 길에 클럽 홍보하는 사람이 붙잡길래 못 이기는 척 들어갈 뻔했다니까. 그렇게 도착한 자리에서 애인과 대판 싸운 거지. 그나마 다행인 건 자리가 다 파하고 얼굴을 붉혔다는 거지만,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팀장님도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진 나를 눈치챘는걸. 원래 둘이 한 잔 더 마시고 놀 요량이었던 나는 화가 나서 애인에게 그럴 거면 집에 가라고 했고, 애인은 택시를 잡았고, 난 집까지 식식거리며 걸어왔어. 욕을 중얼거리다 사람이 보이면 삼키고, 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욕을 중얼거렸어. 그렇게 집까지 걸어와서 전화로 2차전을 한 거야. '고집 피운 건 미안하지만 나는 정말 억울한 상태고 당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는 식의 사과를 살짝 얹은 책망을 마저 텍스트로 보내고 나서야 잠에 들었지.
새삼 내가 손톱 거스러미를 가만 놔두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가려운 곳을 살갗이 부르틀 때까지 벅벅 긁는 일이 자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제도 자기 전까지 긁던 곳이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아주 따가운 거 있지. 왜 손목을 긁으면, 순간의 아픔 때문에 다른 아픔이 잊힌다는 말처럼, 나도 따가움으로 스트레스를 잠시 잊으려는 걸까, 싶더라.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 몸은 늘 내가 제일 못살게 구는구나. 패인 손톱 옆구리를 보고 한숨이 일었어.
그래서 뭐 때문에 그렇게 싸웠느냐고? 나는 기억나지 않는 말을 애인을 분명 내 눈을 보고 했다고 말하고, 나는 확언하는 애인의 모습에 오기가 일어서 그 말을 믿지 않고 계속 쏘아붙인 거야. 중요한 말이었냐고? 그냥 다음 주에 생긴 스케줄 얘기였어. 웃기지? 어이가 없을 정도야. 기억에 없으니 듣지 못했다고 말했고, 그걸 부정하는 애인이 밉고 서러웠어. 애인은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크게 부풀려 화를 내고 우기는 내가 황당했고. 나는 '이번 일 만큼은 전부 당신의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애인이 괘씸했어. 괘씸.. 괘씸이라니, 애인에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일까? 상대를 낮춰보지 않는 이상 쓰면 안 되는 말이 아닌가? 나는 애인 위에 눌러앉고 싶은 건가? 투명한 오전 빛 아래 누워서 한참을 곱씹고 되물으며 나를 미워했어. 어제 열심히 긁어댄 곳까지 따끔거리며 자책에 일조했지. 이번 일은 결국 내 잘못이 8할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연락을 남겼어. 서로 비슷한 정도로 고집을 피우면서 다툴 때에는 자존심 때문에 몇 번을 속에서 뒹굴고야 꺼내던 사과가 넙죽 나왔어. 애인은 아직 화가 난 듯 보였고, 사과를 받는 시기는 그의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니 알았다고 했지.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부탁받아서 빗속을 뚫고 나오는 길에도, 출근을 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마음이 뭐랄까, 되려 침착해. 형벌을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애인의 뇌리에도 어젯밤의 내가 한동안 불쑥불쑥 나타나겠지. 말로 상처받은 건 오래가잖아. 나는 애초에 단어 선택, 어감 하나에도 예민해서 상처받은 말이 생기면 한참이 지나도 불쑥 떠올라서 날 괴롭히거든. 애인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큰 실수를 하나 했구나. 싶은 마음에 참담해지다가도 이미 벌어진 일 뭐 어쩔 건데! 하는 심술이 번갈아 왔다 갔다 해. 오늘 퇴근하고든, 내일 만나서든 마저 잘 얘기해야지. 그전까지는 또 내 일상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