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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셋,
사랑이 그곳에 있어 주어서 (1)

음악으로 기억되는 모든 사랑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사랑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 어딘가에 머무른다. 그러다가 유난히 쨍한 햇빛이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 어떤 물건, 혹은 그때를 닮은 노래 같은 것들이 바람이 되어 지나면, 지난 기억이 자연스레 이마 위에 동동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버들 바람처럼 나를 어루만져 살포시 웃게도 하고, 시린 바람처럼 씁쓸하게 가슴을 쓸어내리게도 한다. 이렇게 옛 기억이 사무치는 건 그 시절을 깊게, 꼭꼭 씹어 보내서 이리라. 시간에 빈틈없이 진한 색의 기억을 채워 넣고 있다. 


영화 <Once>에서 두 남녀가 처음 만났던 아일랜드 더블린의 거리, 그곳에 왔다. 옷가게 건물 앞에서 버스킹을 하는 남자 주인공이 겹쳐 보인다. 그는 목청껏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던 여자 주인공은 그의 노래를 알아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래에 담긴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아직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의 시작이었다. 


‘알아본다’는 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영화 <원스>의 한 장면


영화의 배경이 된 길은 넓은 쇼핑거리라서 이미 여러 버스커들이 거리 곳곳에서 연주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섰다. 밴드는 일반적으로 쓰는 기타나 베이스 대신 관악기와 타악기를 쓰고 있었다. 바람소리는 맑고 아름답고 구슬펐다. ‘이곳 음악은 더 멀리 가고, 마음에 더 가까이 닿는 것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영화 속 노래도 그랬다. 남녀 주인공은 멜로디에 짙은 색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노래로 다가가고, 상처를 끄집어내고, 위로하고, 호소하고, 희망하고, 부르짖고, 체념했다. 


하나의 노래에 하나의 기억.

영화의 OST를 귀에 꼽고 흥얼거리고 있자니 마음을 갈퀴로 한 번씩 훑듯 저 밑에 있던 사랑의 기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내 노래다. 내 노래네.’

마치 별자리 운세를 보듯 가사들을 내 조각에 맞춰 본다.  


『두 날개는 상처투성이, 많은 이에게 빛을 줬지만

   너 자신은 외롭기만 해.

   모든 싸움엔 나름 이유가 있지.

   포기만이 유일한 살 길일 때,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리고,

   너만이 홀로 남았네』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외면은 날카롭고 아팠다. 관계를 만들고 마음을 쏟았던 시간이 있어 상처가 더 컸다. 포기 앞에서 차마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었다. 노래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까.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오선지 위에 그 이야기들을 소상히 늘어놓는 속 깊은 친구 같았다.


 『가라앉는 이 배를 붙잡아 주세요.

   우린 아직 시간이 있어요.

   희망의 말을 해주세요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서툴게 다가갔던 그들은 서로를 뒤로 한 채 각자의 길로 향한다. 그들의 모습 뒤로 어쩌면 그들의 마음일지도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걸음과 달리 마음은 애타게 서로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희망의 말을 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시간, 설익은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이 될 수 없는 사이. 하지만 그들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나눴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몰라요.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당신을 원해요.’라고.


“그 사람을 사랑하니?” 

남자가 묻자 여자는 자신의 모국어인 체코어로 답한다.


“밀루유떼베” (Miluju tebe)

너를 사랑해.   


장난스럽지만 진실되며, 담담하지만 서글픈, 한편으론 볼이 발개질 것처럼 기쁜 묘한 감정. 안타깝게도 체코어를 모르는 남자는 그 말을 공중에 흘려보낸다. 튀어나온 마음이 내려앉을 곳을 못 찾으면 사랑은 길을 잃는다. 


딱 한 번 용기를 내어


“사랑해”


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아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일 것 같았는데… 오늘은 말 안 했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답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환영받지 못 한 마음, 공중으로 날아가버린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사랑해’. 

나의 ‘사랑해’에는 굵은 못이 박혀 있다. 


햇살과 음표가 가득한 아일랜드의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의 한 시대를 장악했던 애착과 사랑의 감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분해되고 증발되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 먼지 같은 것일까, 아니면 그때의 나를 생기로 가득 차게 했기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그것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더라도 나의 삶에 묻어서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으니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위대한 시간들이었다고 다독여도 되는 것은 아닐까. 




s




                                    

찬란했던,

이제는 낡아버린 마음은

지금쯤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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