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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셋,
사랑이 그곳에 있어 주어서 (3)

검은 잔디에 앉아


그가 와 주었다. 

파리의 까만 밤 아래서 절망으로 둘러 쌓여 좌절하고 있을 때, 이제는 정말 혼자라고 외로워하고 있을 때, 문을 빼꼼히 열고 인사를 하듯 고개를 내밀어 주었다. 계획도 없이 찾아와 되려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냥 있어주었다. 울음을 그치라고 종용하지도, 섣불리 달래지도 않았다. 기다려 주었다. 은신처처럼 가만히 어깨를 내어 주었다. 내가 입을 열자 고민의 구덩이 바닥까지 함께 내려가 주었으며, 그곳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에펠탑은 수천 개의 빛에 둘러 쌓여 있었고, 잔디 위에는 그 빛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삼삼오오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하거나 빙 둘러앉아 왁자지껄 와인이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 틈에 나란히 앉았다. 바짝 앉은 일행조차 우리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시끄럽고 낯선 언어가 우리 주위에 결계를 둘러 공간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달까. 그 덕에 우리는 새벽이 되도록 마음껏 이야기를 토해낼 수 있었다. 진짜인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내 이야기를 듣는 네 눈이 반짝여서 그걸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를 진실로 꽉 채우고 그걸 조금씩 뜯어 보여준다면 영영 반짝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저기….”


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죄수복 차림을 한 남자가 다가왔다. 놀라서 쳐다본 그의 다리에는 쇠사슬 족쇄가 달려 있었다. 그는 포스트잇 한 장을 내밀었다. 결혼 전에 친구들과 파티 중인데, 결혼을 앞둔 자신에게 조언을 써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 글귀를 여러 사람들에게 받아서 결혼식 입구에 붙여 놓을 거라고 했다. 함께 더 행복하려고 하는 결혼을 감옥에 갇히는 걸로 해석하는 게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포스트잇을 건네받았다. 사람에게 혹은 무언가에 매이게 되고 이런저런 제약이 생기게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그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터. 



“그녀를 믿고 존중해 주세요. 

그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세요. 

그러면 그녀의 눈이 항상 반짝일 거예요.”


나는 지체 없이 메모를 써 내려갔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축하한다며 메모를 건네자 그는 고맙다며 엄지를 척하고 내밀고는 또 다른 무리를 향해 떠났다. 누군가의 생과 사랑을 통틀어 나온 한마디, 이 한마디가 차곡차곡 쌓여 그의 시작에 큰 축복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문장 하나하나의 무게를 존중한다면 더더욱. 



메모에 마음을 드러내고 나니 마치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볼이 뜨뜻해졌다. 홀짝거리며 마신 와인 때문인지도 몰랐다. 취기가 기분 좋게 입가를 간지럽혔다. 와인 한 모금을 더 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눈 앞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주황빛으로 치장되어 있던 에펠탑이 하얀빛으로 바뀌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선명한 빛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쪽을 향해 작은 탄성을 질렀다. 나의 마음속에선 작은 축제가 열린 것 같았다. 흐르는 빛, 흐르는 새벽, 흐르는 우리. 지금이 생생하게 살아 강렬하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과 삶이 생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플라스틱 와인잔에 보라색 밤을 따르고 수천 개의 빛을 섞어 건배를 했다. 이곳의 낭만이 응축된 한 모금은 우리를 파리의 마법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네가 안 왔으면 이 환상적인걸 못 볼 뻔했네." 

나지막이 말했다. 뒤따라 오는 말은 머릿속으로만 읊었다. 


'네가 없었으면 지금껏 많은 것을 놓쳤을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없었으면 나란 사람은 없었을지도 몰라.'


지난 시간을 통틀어 함께였기에 가능한 것들이 수없이 떠올랐다. 굳이 이것을 거창하게 꺼내어 열거하지 않아도 지금의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삶에 있어주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네가 와준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있어서 검은 밤마저 빛이 더욱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이 되었다. 


거기에 있어주어 고맙다. 

내 풍경에 네가, 네 풍경에 내가 늘 있었으면 좋겠다.

그 풍경을 그리면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되도록.


모든 이야기가 모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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