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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Feb 10. 2019

낙엽 여섯,
그들 삶의 문을 두드리다 (2)

램프 리어카와 씨앗

"시인은 자세히 봐야 예쁘다고 했지만 그런 삶의 자세를 견지하기 시작하면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예쁘지 않거나 애틋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정은우 작가님의 <아무래도 좋을 그림>이라는 책에서 본 글귀이다.

몇 달간 이도시 저도시를 기웃거리고 있으려니 참 여행이란 게 그런 자세를 갖게 만드는구나 싶다.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란 참 신기하다. 길과 건물, 풍경, 사람, 그들 사이에 있는 공기, 어디에나 있는 그들의 매일. 어찌 보면 평범한 것들인데도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행자의 시선에는 애정 어린 눈빛이 담긴다. '예쁘게 여기는 마음' 필터가 한 꺼풀 정도 씌워져.


터키 쿠사다시의 어느 광장 한편에서 램프 장사를 하는 여인이 램프등 빛을 받아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빨갛게 치장된 수레에는 여려 빛깔의 램프가 손님을 기다리며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 때면 리어카 천장에 달려있는 빛 덩어리들이 이리저리 그네를 타고, 그녀의 얼굴에도 빛이 드리웠다가 지나곤 했다. 그녀는 빛을 만들어 내는 조물주처럼 뭉툭하고 단단한 조롱박을 능숙하게 만지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 조롱박으로 램프를 만드는 거예요?” 


이때다 싶어 그녀 손에 있는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다시 손가락으로 조롱박과 램프를 번갈아 가며 콕콕 집어 ‘이걸로, 이게 만들어지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줄기에서 나온 걸까 싶을 정도로 크기가 제각각인 크고 작은 조롱박들이 예쁜 빛 드레스를 입고 옹기종기 모여있다. 둥근 면을 따라 비즈가 열과 리듬을 맞춰 촘촘히 박혀있는 모양이 꼭 어릴 적 운동회에서 부채춤을 추던 고운 아이들 같았다.

현란하고 짜임새가 정교한 패턴의 램프가 있는가 하면, 눈사람처럼 얼굴과 몸통을 그려 놓은 우스꽝스러운 램프도 있다. '이게 정녕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피식하고 웃었다. 공장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만든 사람의 취향과 상상력이 묻어 있는,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자유로운… 그녀의 머릿속 어딘가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직접 다듬고 뚫어서 만든 조롱박 램프. 그래서인지 이곳은 오색찬란하면서도 따뜻한, 아름다우면서도 소박한, 특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여인은 램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수레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작업공간이었다. 수십 칸으로 나뉜 서랍에는 구멍을 뚫는 도구도 있고, 색을 칠하는 도구들, 그리고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비즈들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녀의 작업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신기한 건 그곳이 아주 좁고 단정한 공간이었는데도, 다양한 색의 비즈가 강렬했던 탓인지 나의 기억 속에는 마치 반짝이는 수정동굴에 있는 듯한 환상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수정 동굴에서 넋을 놓고 구경을 하다가 그야말로 최고의 보물을 발견했다. 나무 조각 같은 것들이 든 작은 봉지였다. 겉에는 조롱박 램프 사진이 붙어 있었다. 


“혹시 이거, 조롱박 씨앗?!”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이번에도 주인은 맞다고, 그래 맞다고 몇 번이나 끄덕여 주었다. 큰 조롱박 램프가 자라는 씨앗. 딱딱하고 큰 조롱박이 이 손톱만 한 조각에서 나온다니! 식물이 자라려면 씨앗에서부터 싹이 자라 커져서 열매를 맺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세상 처음 본 듯 신기했다. 씨앗과 램프들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아도 연금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35리라에 씨앗 여섯 개가 든 봉지를 받아 들고 이미 램프를 가진 듯 기뻐하며 함박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세계 일부분을 똑 떼어서 두 손에 받아든 것 같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씨앗을 화분 한쪽에 심었다. 나의 방 한편에 그녀의 세계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설렜다.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축축한 흙더미를 바라보는 내 눈에 반짝이는 빛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조르르 선 램프들과 그녀의 은은한 미소가 담아준 빛이었다. 


세상을 걸으며 마주치는 기억, 웃음, 얼굴 하나하나 그녀가 비즈를 정성껏 박듯 나의 조롱박에 촘촘히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의 세계를 읽게 되었을 때, 그녀의 삶이 내 눈에 빛을 담아주었듯 그 누군가의 눈에도 예쁜 세상의 빛이 담길 수 있기를 바랐다.






싹이 올라왔다.

여태껏 봐왔던 어느 새싹보다 

두툼하고 튼튼한 새싹.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진짜 크고 대단한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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