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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Feb 24. 2019

[ROTC 장교 한 번 해볼래?]
아버지의 편지

그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위문편지.

후보생의 입영훈련 막지막날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당도했다. 나의 아버지 편지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편지를 써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시는 분이다. 더군다나 군대와의 거리를 따져보면 우리 아버지는 가장 멀리에 계신 분이라 할 수 있다. 6개월 방위 출신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군대 이야기를 잘하시지 않을뿐더러 나의 친형은 신병교육대에서 전투경찰로 차출되어 경찰로 군 복무를 마쳤다. 우리 집 남자들 중에 군대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군대 생리를 모르니 군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를 못하셨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원체 부끄럼이 많은 경상도 남자라 아마 간질간질한 기분에 볼펜을 들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편지의 주는 의미

오늘의 세대에게 편지는 어쩌면 구시대 산물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간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넣어본 경험을 묻는다면 100명 중 1명이 손을 들어줄까 싶다. 사실 나조차도 우표는 어디에서 파는지 또 우체통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같은 배송 서비스이지만 택배랑은 왠지 거리가 멀다. 편지라는 것은 순수하게 글을 적어 보내는 행위다. 물건을 담아 보내는 택배와 달리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유튜브 동영상과 트위터 단문에 익숙한 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엄청난 정성이다.


우체통과 손편지 / 출처 : 한겨레 신문


고지서만으로 가득하던 우편함을 달리 보게 되는 건 입영훈련을 다녀와서부터다. 글을 쓰고 보내고,  그리고 받는 데까지 족히 3일은 걸리는 일이지만 편지만이 주는 감성과 감동이 있다. 겨울방학 훈련 같은 경우는 겨우 2주지만 그 짧은 기간에서도 편지로 일어나는 많은 희로애락이 있다.


이별통보

동기생 하나는 훈련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여자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 생활관에서 가장 먼저 편지를 받은 친구라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부러움을 단번에 샀다. "홍길동 후보생" 호명에 "후보생! 홍길동!" 우렁차게 답변하고 당직사관이 전해주는 편지를 받아 들고 뒤돌아서는 그의 얼굴에선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른 자리로 들어와 편지봉투를 살짝 뜯어내자 "팅"하는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저게 뭐지 하고 봤더니 커플링이었다. 여자 친구가 이별통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커플링과 함께.


위문편지 / 출처:MBC 진짜 사나이


그 동기생은 훈련 기간 내내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보냈고, 다른 동기들은 틈만 나면 커플링 이야기를 하면서 놀려댔다. 얼마나 헤어지고 싶었으면 2주간의 훈련을 틈타 계획적으로 편지를 쓰느냐고. 휴대전화가 있기 전 80년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 숨 쉰다.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 조차 설렜고 늦은 밤 후레쉬 불을 밝혀가며 삐뚤빼뚤 글씨를 채워서 보냈던 편지가 당도하기를 기대하는 맘으로 훈련의 어려움을 잊어나갔다.



잊을 수 없는 편지 한 통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편지 한 통을 꼽으라면 후보생 시절 훈련기간의 아버지의 편지를 들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아버지의 편지는 아니다. 다른 동기생의 아버지가 학생종합군사학교 학교장(2성 장군)에게 써서 보낸 편지다. 아니 사랑하는 애인의 편지도 자식을 훈련 보내고 하루하루 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시는 어머니의 편지도 아닌 남의 아버지가 보낸 그것도 학교장에게 보낸 글이 왜 기억에 남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편지는 학교장이 수료식 날 훈시문을 대신해서 읽어주었다. 학교장이라 하면 투스타 장군, 소장이다. 소장이면 군에서 사단장과 동일한 계급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다. 그런 높은 지위의 사람이 행사에서 한 이야기는 대개 한 귀로 흘려듣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껏 수많은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전혀 없다. 오히려 기억에 남는 게 더 특이하다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장 선생님 말씀을 기억해서 지금까지 남을 돕고..." 주변에서 이런 말을 한 이를 본 기억은 없다.

ROTC 행사 지휘관 훈시의 한 장면 /출처: 교통환경타임즈

이 학교장이 훈시를 했던 행사는 수료식이다. 입영훈련기간 내내 기다려온 날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지내다 사회로 나가는 기분은 전역의 기쁨과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날 실시하는 퇴소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날에 하는 훈시를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한 동기생 아버지의 편지가 그날의 모든 것을 기억에 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입영훈련 마지막 날, 한 아버지의 편지.

"한 후보생 아버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고, 혼자서만 읽어보기엔 아쉬워 오늘의 훈시는 편지글로 대신하려 합니다."

학교장은 이 말로 수료식 훈시를 시작했다. 순간 누구의 아버지가 이런 편지를 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편지를 자기 아들에게 쓰면 될 것을 얼마나 눈에 띄려고 이런 걸 학교장에게 까지 보내나 하는 나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장한 우리 아들이 장교가 되려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뿌듯하면서도 한켠으로는 고생하는 모습이 마음이 아프다'라는 예상 가능한 뻔한 이야기로 가득할 거란 생각이었다.





학교장님께. 이 시간에도 군의 허리를 담당하는 초임장교 양성에 힘써주시는 학군교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분들께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한 장교 후보생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선배 장교로써 후배 장교들을 위해 학교장님께 몇 가지 주제넘는 고언을 드리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의 마음이야 내 아들이 몸 건강히 부모 곁으로 와주는 것 외에 더 바랄 게 없지만, 우리 아들이 택한 길이 장교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런 부모의 걱정이 나약한 장교를 만들진 않을까 항상 경계하게 됩니다.


학교장님, 제가 이 편지에 드리는 글은 제 아이를 잘 봐달라는 것, 편의를 요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 아들을 포함한 후배 장교들을 이렇게 양성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 요청을 드립니다.


첫째로, 부하를 사랑하는 장교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제 한 몸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부하의 궁핍을 감싸게 해 주십시오. 비록 자신은 굶주리더라도 부하의 배를 곯게 하지 않는 장교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추위엔 옷을 벗어주고, 더위엔 그늘을 내어주는 자신을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여 부하를 챙기는 그런 따듯한 마음의 장교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부하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장교는 더 이상의 장수라 할 수 없습니다.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그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존경을 받는 장교가 되길 소원하는 바입니다.


둘째로, 나라를 위하는 장교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설 때 가장 앞장서 조국을 지키는 위국헌신의 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선배 장교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흘린 피를 기억하여 조국의 위기에 등을 돌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질 수 있는 장교가 되기 바라니다.

상무정신으로 언제든 적이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음을 새기고, 언제든지 그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강한 정신과 능력을 키워주시기 당부드립니다.


셋째로. 적에게는 무시무시한 군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하에게는 한없이 따듯하나 적에게는 냉철한 장교로 양성해 주십시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께서 출진하시면 왜구들은 그 명성만으로도 겁을 내며 전투의지를 상실했습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적군의 사기가 꺾이는 장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시고 임전무퇴의 기상으로 적과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정식력을 배양하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처럼 가슴을 울린 편지는 없었다. 군 생활이 힘겨울 때 이때 편지의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남아 나를 지탱해 주었다. ROTC 장교는 훈련을 통해서 강해지지만, 동기와 선배 장교로부터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장하기도 한다.


 훗날 나의 자녀가 학군단에 입단하면 나의 동기 아버지가 그랬듯이 내 후배 장교들을 위해 꼭 한 통의 편지를 부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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